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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개념어사전

20220726-혁신

posted Jul 27, 2022, 1:14 AM by hyoo@crevate.com   [ updated Aug 1, 2022, 10:35 AM by Sung Youn PAK]

개념어사전은 사어 심폐소생술
사람들이 쓰지 않아서 죽은 말을 사어(死語)라고 한다.
그런데 분명히 자주 쓰이는데, 아무도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말이 있다.
이런 말도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말이다. 그 말만의 느낌, 생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말이 너무 많이 쓰이다 보면 쉽게 뜻을 잃고 사소한 말로 전락한다.
예컨대 모두가 인사치레로 '사랑합니다'라고 한다면, 사랑을 원래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라질 것이다.
개념어사전은 이들 '현대판 사어'들의 본래 정의와 맛을 되살리는 연재물이다.

크리베이트가 정의합니다, '혁신'마저 죽기 전에
추상적인 말은 모두가 동의하는 뜻을 정의하기 어려워서 아예 시도조차 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의되지 않은 용어를 목표로 삼는 것은 그저 좋은 말 퍼레이드에 불과하다.
모두가 혁신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혁신의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적다.
크리베이트는 개인과 기업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여 혁신하도록 돕는 회사이다.
그래서 오늘 개념어사전에서는 크리베이트의 방식대로 혁신을 정의해보고자 한다.

사전적 정의 속 여러 낱말
혁신이란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이다.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하나씩 살펴보자.
'묵은'은 '시간이 오래된'이라는 뜻인데,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기존의, 이미 존재하던'이라고 해석하기로 한다.
'풍속'이나 '관습'은 '사회의 오랜 습관'이요, '습관'은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하며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이다.
'조직'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집단' 또는 그 구조를 뜻하며, '방법'은 '어떤 일을 하거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취하는 수단이나 방식'이다.
'새로움'은 '전과 달리 생생하고 산뜻하게 느껴지는 맛이 있음'을 뜻한다.

문답으로 혁신 정의하기
문답으로 혁신을 더 구체적으로 정의해보자.
Q. 혁신의 대상은 무엇인가?
A. 이미 존재하던 사회적 습관, 집단의 구조, 목적 달성의 방법이다.
'이미 존재하던' 것이 아니면 혁신할 수 없다. 즉 혁신의 대상은 미지의 무언가나 먼 미래의 무언가가 아니다. 현실에서 인간이 파악하는 무언가다.
또, 혁신은 개별적, 일시적인 대상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대상에게는 혁신보다는 '수리' '개선' '조정' 등의 말이 어울린다. 혁신은 한결 집단적, 지속적인 대상과 어울린다.
Q. 혁신의 방법은 무엇인가?
A. '완전히 바꾼다'.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대체한다는 뜻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완전히'란 '모자람이나 흠이 없이'라는 뜻으로, 완전히 바꾼다는 것은 바꾸기 이전과 비교하여 특별히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예컨대 회사의 제품 검증 프로세스를 혁신한 후, 제품 하자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면 그것은 혁신이라 볼 수 없다.
단지 디자인이 예뻐진다고 혁신이 아니다. 바꾼 후에도 기존 이상으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정리하면, 혁신이란 '현실에서 인간이 파악하는' '집단적, 지속적인 대상을' '변화 후에도 기존 이상으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새롭게 하는 행위'를 뜻한다.

한자와 영어로 쓴 혁신
혁신(革新)은 가죽/고칠 혁(革)에 새로울 신(新)을 쓴다.
革은 동물의 가죽을 손으로 펼치는 모습으로, 가죽을 가공하는 과정을 나타내어 '가죽, 펴다, 고치다'라는 뜻이다.
新은 도끼(斤)로 나무(木)를 베어 땔감으로 만드는 모습으로, '새로운 물건을 만듦'으로 뜻이 확장되었다.
영어로 혁신은 innovation이다. 15세기 중엽 innovacion은 'restoration(회복, 복원), renewal(갱신, 재개발)'의 뜻으로 쓰였다.
이는 라틴어 innovare(교체하다, 갱신하다)에서 온 것으로, innovare은 'into'라는 뜻의 'in-'과 'new'라는 뜻의 'novus'의 합성어이다.
'새로운 변화, 실험적 변화, 새롭게 소개된 것'을 뜻하게 된 것은 1540년대부터이다.

창의와 혁신의 관계
창의는 '새로운 의견을 생각하여 냄. 또는 그 의견'이다.
즉 새로운 아이디어, 또는 그것을 내는 과정인 아이데이션을 지칭한다.
창의를 현실에 적용하면 혁신이 되기도 한다.
창의를 현실에 적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활용해 제품이나 서비스를 기획/개발한다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 환경, 모든 구성원이 최고의 에너지로 아이데이션에 참여하는 문화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혁신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습관과 구조를 혁신하는 조직은 '혁신적'이라 할 수 있다.
혁신적인 조직은 유연하므로 새로운 아이디어에 도전하고 실험하기 유리하다.
정리하면, 창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혁신이 이루어지며, 혁신적 조직은 창의를 실천하기 유리하다.
창의와 혁신은 선순환하며 조직과 구성원의 유연성, 문제해결 능력, 현실 적응력을 키운다.

개선, 혁신, 개혁, 혁명 4형제
혁신과 헷갈리는 단어인 '개선' '개혁' '혁명' 그리고 '수리' '조정' '발명'의 뜻을 각각 살펴보며 비교해보자.
개선은 '잘못된 것이나 부족한 것, 나쁜 것 따위를 고쳐 더 좋게 만듦'이다. 포괄적인 말이라서 다른 형제들과 비교하면 어감이 가장 흐릿하다.
개혁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으로, '제도'나 '기구'라는 낱말에서 알 수 있듯 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쓰인다.
혁명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새우는 일'로, 국가나 사회 등 거시적인 측면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는 운동을 뜻한다.
보통 변화의 규모나 급진적인 정도에 따라서 '개선<혁신<개혁<혁명' 정도로 나열된다.

수리, 조정, 발명과의 차이
수리는 '고장 나거나 허름한 데를 손보아 고침'이다. 그러면 수리와 혁신의 차이는 무엇일까?
개별 사물의 고장은 조직/방법의 그것보다 구체적이며, 상대적으로 쉽게 파악하고 쉽게 고칠 수 있다.
또한 수리의 대상은 고장 나거나 낡은 것이지만, 혁신의 대상은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이미 존재하던 것이면 된다.
조정은 '어떤 기준이나 실정에 맞게 정돈함'이다. 대상을 현실이라는 틀에 맞추는 작업으로, 나온 곳은 집어넣고 부족한 곳은 채워 넣는 것이다.
반면 혁신에는 기본적으로 틀, 기준, 한계가 없다. 현실이라는 틀이 바로 혁신의 대상이다.
발명은 '아직까지 없던 기술이나 물건을 새로 생각하여 만들어 냄'이다. 발명의 대상은 기술이나 물건이다.
발명은 주로 특허를 통해 국가의 인증을 받는다. 따라서 발명은 '아직까지 없던' 것을 만들어냈음을 증명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비슷해보여도 다르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반면 혁신에서 중요한 것은 '혁신 전후의 차이, 그리고 혁신 후에도 잘 작동하는지'이지, '전에 없던 것으로 바꾸었는지'는 아니다.
물론 전에 아예 없던 것을 생각해내서 적용했다면 참으로 멋진 도전이지만, 언제나 그러한 천재적 창의력을 발휘할 수는 없으니 다른 혁신의 선례도 참조해야만 한다.
혁신가는 거인의 어깨 위에 앉기를 주저하면 안 된다.

정리1) 혁신은 지속적, 집단적인 것이므로 각오가 필요하다
혁신은 현실에서 여러 사람이 지속적으로 따르는 규칙, 방법 등을 새롭게 하여 목적을 더 잘 이룰 수 있게 만드는 행위이다.
개별적, 임시적인 대상에게 혁신이라는 말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예컨대 특정 제품을 혁신한다는 말은 너무 거창하다.
제품을 '개선'이 아니라 '혁신'한다고 하려면, 적어도 그 제품과 관련된 주제나 공정, 지식과 절차를 새롭게 하려는 각오까지 되어 있어야 한다.

정리2) 혁신가는 현실을 잘 관찰해야 한다
대체로 현실에 뒤떨어진 것이라 혁신의 대상으로 선정되는 경우가 많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즉 현실에서 무난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도 얼마든지 혁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혁신가는 지금 문제 없어 보이는 대상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어떻게 새롭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정리3) 혁신의 최종 목적은 더 나은 문제 해결이다
혁신은 현실이라는 틀을 바꾸는 일이기에 그 자체의 기준이나 한계는 없다.
그러나 그 틀을 마구잡이로 망쳐 놓고 혁신이라고 우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틀은 문제 해결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새로운 틀을 만들 때에도 그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
혁신 전후를 비교했을 때, 혁신 후가 전보다도 문제 해결을 못한다면 그것은 혁신이 아니다.

20220726-노력

posted Jul 26, 2022, 6:09 PM by hyoo@crevate.com   [ updated Jul 26, 2022, 11:15 PM by Sung Youn PAK]

'더 노력해 보세요.'
이는 참으로 추상적이고 매정한 충고이다. 어떤 고민 상담이든 이 말 한 마디면 떨쳐낼 수 있다.
도대체 노력이 무엇이길래 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력하라, 노력하라'라고 소리치는 것일까?
성공의 정의에 대해 고민하듯, 가끔은 노력의 정의도 고민해보자.

노력은 몸으로, 마음으로 하는 것
노력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하여 애를 씀'이다.
사전적 정의에 '몸과 마음을 다한다(모두 들이다)'라는 말이 있다니, 웬만한 노력은 노력도 아닌가 보다. 이는 정도의 문제이니 논외로 하자.
노력의 핵심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애를 씀'이다.
'애쓰다'는 의미상 '힘쓰다'와 같고, '힘쓰다'는 '힘을 들여 일하다'이니, 노력은 '목적을 위해 힘 들여 일함'이다.
여기서 '힘들이다'는 단순히 육체적 힘을 쓴다는 것이 아니라, '기운을 발휘하다', '어떤 일에 마음이나 힘을 기울이다'라는 뜻이니, 육체적, 정신적 자원을 투입하는 것을 말한다.
정리하면, 노력은 '목적을 위해 육체적, 정신적 자원을 투입함. 또는 투입한 자원'을 뜻한다.
즉 돈 같은 물질적 자원은 포함하지 않는다.
예컨대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분명 노력이지만, 이들을 위해 동창회 선배들이 준비한 장학금 자체를 노력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대신에 '선배들의 마음'이나 '정성'이라는 말을 쓴다.

한자와 영어로 쓰는 노력
'노력'의 력은 힘 력(力), 노는 노비 노(努) 또는 일할 노(勞) 자를 쓴다.
힘쓸 노(努)는 노비(奴)처럼 힘써서 일한다는 뜻이며 일할 노(勞)는 밤에도 불(火)을 밝힌 채 열심히 일한다는 뜻이니, 어느 한자로 쓰든지 '힘을 들여, 괴로움을 참고, 어려움을 견디며' 일한다는 뜻은 같다.
영어로 노력은 effort로, 15세기 후엽에 '힘든 시도, 분투'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 발견된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통속 라틴어 exfortiare인데, '힘을 발휘하다, 드러내다'라는 뜻이다.
이때 'ex-'는 '밖으로'라는 뜻의 접두어, 활용된 'fortis'는 현대어 fort, force 등에서 볼 수 있듯 '강한'이라는 뜻이다.

노력의 유의어, 정성과 열정
정성은 '온갖 힘을 다하려는 참되고 성실한 마음'이다.
여기서도 '힘을 다한다'라는 표현이 쓰였는데, 실제로 다하고 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그 참된 의도가 '힘을 다하려는' 것이면 정성이다.
노력은 자원을 투입하고 있는 상태, 또는 그 자원 자체를 지칭하므로 관찰과 측정이 가능한 경우가 많지만, 정성은 의도를 지칭하므로 직접 관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때때로 선물을 주면서 '이건 제 정성입니다'라고 말하는 경우, 정성은 물질에 숨겨진 의미를 강조하는 포장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열정은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다.
즉 뜨거운 사랑으로 정신을 쏟는 마음인데, 노력과는 달리 어떤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점을 내포한다.

노력의 반의어, 게으름
게으름은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이다.
게으름의 사전적 정의는 단순하지만, '저 사람 참 게으르다'라는 평가는 매우 다양한 뜻을 내포할 수 있다.
그는 매사에 성과를 내기 전 쉽게 포기해버리는 사람일 수도 있고,
한번에 쓰는 에너지의 양이 적어서 쉽게 지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 맞는 일이 아니면 효율이 매우 낮은 사람일 수도 있다.
이들 각각에 대해서는 순서대로 '성취감, 충분한 휴식, 적성 특화 혹은 연계' 등 각각 다른 처방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노력하세요, 자원을 더 투입하세요'라며 추상적인 충고만 반복한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정리하면?
노력은 '목적을 위해 투입하는 힘, 즉 육체적/정신적 자원'을 통칭하는 추상적인 말이다.
따라서 '노력이 부족해서 그래', '더 노력하세요'라는 충고는 사실상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
게으름은 다양하다. 어떤 게으름인지 파악하고, 어떤 자원을 어떻게, 얼마나 투입할지 정확히 피드백해야만 개선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최근에 어떤 목표를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가? 단순히 '밤새 공부를 했다'가 아닌, 공부의 구체적인 항목을 나열해보자.
투입한 자원과 비교하여 목표는 얼마나 달성했는가? 부족했다면, 다음에는 어떤 자원을 어떻게 투입해야 할까?
충분했다면, 다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같은 자원을 투입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20220726-청결

posted Jul 26, 2022, 3:32 PM by hyoo@crevate.com   [ updated Jul 26, 2022, 3:36 PM by Sung Youn PAK]

전염병이 돌 때마다 손 씻기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그런데 사실 손을 아무리 박박 씻어도 손이 완전히 '깨끗한' 상태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손을 씻는다. 실제로 깨끗한지는 둘째 치고, 손을 씻으라고 교육 받았기 때문이다.
청결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 무언가가 청결하다고 느낄까?

청결은 안팎의 상태를 통칭함
사전을 보면 '청결'이란 '맑고 깨끗함'이다.
'맑다'는 '잡스럽고 탁한 것이 섞이지 아니하다', '깨끗하다'는 '더럽지 않다' 또는 '가지런히 잘 정돈되어 말끔하다'라는 뜻이다.
즉 '맑음'는 내적인 청결, '깨끗함'은 외적인 청결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무엇이든 묻거나 남으면 더러울 수 있음
'더럽다'는 '때나 찌꺼기 따위가 있어 지저분하다'라는 뜻이다.
'때'는 '옷이나 몸 따위에 묻은 더러운 먼지나 분비물', '찌꺼기'는 '액체가 다 빠진 뒤에 바닥에 남은 물건'이라는 뜻이니,
'더러움'은 '외부, 또는 내부에 무언가 묻거나 남아서 새것처럼 순수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얼마나 묻거나 남아야 더러운 상태인가? 민감한 사람일 수록 기준이 엄격하다.
같은 때나 찌꺼기를 보고도 누군가는 청결하다고, 누군가는 더럽다고 말할 것이다.
완전무결한 새것이 아닌 이상, 모두에게 청결하게 보일 수는 없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청결은 상대적이다.
미세먼지 '나쁨' 상태의 도심 공기는 물론 누가 봐도 청결하지 못한 상태지만 말이다.

맑은 물은 만물을 씻긴다
청결(淸潔)은 맑을 청(淸)에 깨끗할 결(潔)을 쓴다. 둘 다 물 수(水) 변이다.
청(靑)은 우물가에 핀 푸른 초목을 그린 것으로 '푸르다'라는 뜻이니, 청(淸)은 물이 푸를 정도로 맑다는 뜻이다.
한편 결(潔)은 오른쪽 부분이 칼(刀)로 목판에 새기듯, 줄(糸)을 꿰듯 굳게 한 약속이라는 뜻으로, '깨끗하다'라는 뜻을 지니므로, 물이 사물을 깨끗이 씻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영어에서도 영혼이 clean할 수 있다
영어로 '청결한, 깨끗한, 맑은'은 clean이다.
고대 영어 clæne에서 왔으며, 짐승에게 이 말을 쓰면 '(예식법에 의해)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 않은'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고대 독일어 klein(섬세한, 좋은, 작은)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우리가 '그는 전과가 없어. 깨끗해'라고 말하듯, 영어에서도 clean은 '도덕적으로 깨끗한, 정정당당한'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soul이 clean한 것은 물론 '영혼이 맑은' 것이다.

방은 청소하듯 몸은 위생한다
청결과 관련된 말을 살펴보면, '위생'은 '건강에 유익하도록 조건을 갖추거나 대책을 세우는 일', '청소'는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함', '정돈'은 어지럽게 흩어진 것을 규모 있게 고쳐 놓거나 가지런히 바로잡아 정리함'이다.
따라서 모든 위생의 목적은 건강이며, 모든 청소와 정돈의 목적은 청결이다.
몸 안팎에 때나 찌꺼기가 오래 있으면 건강을 해친다. 따라서 건강하려면 청결해야 하고, 위생하려면 몸도 청소/정돈해야 한다.
하지만 더러워지기 두려워 무균실에서 사는 사람은 면역력(몸 안의 더러움과 싸울 힘)을 키우기 어려워 오히려 건강을 해칠 것이다. 또 너무 자주 씻어도 일상생활이 어렵다.
결국 내 방이든, 내 몸이든, 적절한 청소 주기와 정도를 설정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청소의 두 가지 근거: 청결 감각과 청소 원칙
방 청소를 언제 할까? 손을 언제 씻을까?
어차피 완전한 청결은 없으니 '아, 더러워, 슬슬 청소해야겠네'라는 생각이 언제 드는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감각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감각에만 의존하여 청소 주기를 설정하다가는 보이지 않는 먼지를 들이마셔서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청소 주기는 사회적으로 약속되어 있다. 적어도 주말에 한번은 집안 청소를 하고, 밥 먹기 전에는 손을 씻어야 한다.
청결에 매우 민감한 사람을 제외하면,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청소는 '청결 감각' 대신 약속된 '청소 원칙' 때문에 수행된다.
따라서 청소는 본래 목적인 청결을 추구하는 의식적 노력이라기보다는 그저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더러움-깨끗함의 스펙트럼, before/after
우리는 자신의 '청결 감각'을 의식하고 단련할 일이 별로 없다.
청결 감각을 의식하려면 '더러움-깨끗함'의 스펙트럼이 필요하다.
즉 어떤 공간이나 물체를 '너무 더러운 상태'에서 '완전 깨끗한 상태'라는 스펙트럼 위에 올려놓고, 과연 스펙트럼의 어디쯤에서 내가 그것을 '청소해야겠다'라고 마음먹게 되는지,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
청소 도구 광고는 언제나 before/after를 보여준다. '청결 감각'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더러움-깨끗함'의 스펙트럼에서 극단적인 두 부분을 떼어내 보여주면, 그저 일상적으로 청소를 하던 사람들조차 청소의 본래 목적인 청결을 크게 의식하게 된다.

정리하면?
완전한 청결은 없다. 대부분 상황에서 청결은 상대적인 감각의 문제이다.
청소의 목적은 청결이므로, 청소 주기나 정도는 '슬슬 청소해야지'라는 생각이 언제 드는지, 즉 개인의 '청결 감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청소는 이러한 청결 감각보다는 정해진 청소 주기에 따라 일상적으로 수행된다.
청소 도구 광고가 극단적인 before/after를 보여주면, 사람들의 청결 감각은 잠시 살아난다.

고민해보자
결 감각을 일깨우는 또다른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청소 외에도,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 가운데 본래 목적을 일깨울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20220624-'CREVATE 개념어사전' 소개문구

posted Jun 24, 2022, 3:46 PM by hyoo@crevate.com   [ updated Jun 29, 2022, 11:11 AM by Sung Youn PAK]

원안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개념어들을 마주합니다.
공유 경제, 구독 서비스, 소비자 경험... 하지만 이런 말들, 하나하나 뜯어보신 적이 있나요?
공유와 분배는 어떻게 다를까요? 경험과 체험은 어떻게 다를까요?
단어는 인식의 틀이며, 인식의 틀을 명확히 인지하지 않고서 그것을 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창의적이고 싶나요? 정의부터 명확히 하세요. 크리베이트 '개념어사전'과 함께.​

0627 박성연 수정 

사랑은 단어일까요? 개념일까요?  

개념이란? 
개념은 단어의 의미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끼고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의 갖는 개념입니다. 

왜 개념을 알아야 할까?  
개념은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개념을 영어로 하면 컨셉입니다. 
즉, 새로운 아이디어가 발전되어 컨셉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일입니다. 
당연히 기존에 있던 개념들부터 제대로 이해해야 새로운 개념도 만들 수 있겠죠.   

그래서 앞으로?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개념어들을 마주합니다.
공유 경제, 구독 서비스, 소비자 경험... 하지만 이런 말들, 하나하나 뜯어보신 적이 있나요?
공유와 분배는 어떻게 다를까요? 경험과 체험은 어떻게 다를까요?
언어란 인식의 틀이며, 인식의 틀을 명확히 인지해야 있던 개념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도 있고 새로운 개념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개념들을 다시금 곱씹어보고자 합니다. 
크리베이트 개념어 사전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0628 유형준 수정


사랑은 단어일까요, 개념일까요?

개념이란?
개념은 단어의 의미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끼고 소중하게 여긴다'라는 개념을 내포합니다.

왜 개념을 알아야 할까?
개념은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개념은 영어로 컨셉(concept)입니다.
즉, 새로운 아이디어를 다듬어 컨셉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은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일입니다.
당연히 기존에 있던 개념들부터 제대로 이해해야 새로운 개념도 만들 수 있겠죠.

그래서 앞으로는?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개념어들을 마주합니다.
'공유 경제', '구독 서비스', '소비자 경험'... 하지만 이런 말들, 하나하나 뜯어보신 적이 있나요?
공유와 분배는 어떻게 다를까요? 경험과 체험은 어떻게 다를까요?
언어란 인식의 틀이며, 인식의 틀을 명확히 인지해야 있던 개념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도 있고 새로운 개념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개념들을 다시금 곱씹어보고자 합니다.
크리베이트 개념어 사전을 시작합니다.

20220328-소통 (8월업로드)

posted Mar 28, 2022, 5:47 PM by hyoo@crevate.com   [ updated Jun 30, 2022, 12:05 PM by Sung Youn PAK]


[1]뼈대


공동체에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마다 지목되는 원인이 '소통의 부재'이다.
마치 소통만 되면 만사 오케이라는 식이다. 그런데 꼭 소통을 해야 화합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염화시중의 미소'라 하여 별다른 소통 없이도 제자들에게 뜻을 전하지 않았는가?
소통이 무엇이기에 너도나도 그 필요성은 외치면서도 막상 나서기를 꺼리는 걸까?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다. (https://ko.dict.naver.com/#/entry/koko/6c58c9ea49ac4e82959a40bc1d91343e)

두 번째 의미는 흔히 말하는 '의사소통' 즉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함'과 같은 뜻으로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의미이다. 한편 첫 번째 의미는 주어가 없어 무엇이 잘 통한다는 말인지 확실치 않다. 그런데 사전에서 비슷한 말로 '교통'(서로 오고 감. 또는 소식이나 정보를 주고받음), 교류, 왕래 등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그 주어는 사람이나 소식, 정보인 것 같다. 교통의 요충지에 사람이 많이 오가면 자연히 소문, 소식이 떠돌고, 정보가 유통되기 마련이니 이 현상을 한 단어로 지칭할 만한 것이다. 그러한 소통(1)의 장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2)일 것이다. 즉,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에 가서 정보를 캐내려 해봤자, 말이 통하지 않으면 알아듣지도 못하며 맥락을 모르면 오해하기 마련이다.

영어로 communicate는 (특성, 기분, 정보 등을) '전하다, 주다'의 뜻으로 1520년대부터 쓰였다 한다. (https://www.etymonline.com/word/communicate#etymonline_v_28434)
이는 라틴어 communicare 즉 '나누다, 알려주다, 공통되게(common) 만들다'에서 온 말이다.

한자로 소통(疏通)은 소통할/트일 疏에 통할 通을 쓴다.
疏는 발 소(疋) 자와 깃발 류(㐬) 자가 결합한 모습으로, 㐬의 본래 뜻인 '떠내려가다', '흐르다'에 발을 뜻하는 疋가 더해져 '길을 가는 것이 물 흐르듯 순조롭다, 막힘이 없다'라는 뜻이다. 通은 쉬엄쉬엄 갈 착(辶)에 길 용(甬)이 결합한 모습으로, 甬은 고리가 있는 종을 뜻하여 通은 원래 '(속이 텅 빈 종처럼 뻥 뚫린) 곧게 뻗은 길'을 뜻한다. 길이 뚫려있으니 이동하기 수월하고 거침이 없다는 뜻에서 '통하다, 내왕하다'라는 뜻이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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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쓰기


공동체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꼭 '소통의 부재' 탓을 하곤 한다.
마치 소통만 되면 만사 오케이라는 식이다. 그런데 꼭 소통을 해야 화합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염화시중의 미소'라 하여 별다른 소통 없이도 제자들에게 뜻을 전하지 않았는가?
소통이 무엇이기에 너도나도 그 필요성은 외치면서도 막상 나서기를 꺼리는 걸까?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1)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2)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다.
두 번째 의미는 흔히 말하는 '의사소통' 즉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함'과 같은 뜻으로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의미이다.
한편 첫 번째 의미는 주어가 없어 무엇이 잘 통한다는 말인지 확실치 않다.
그런데 사전에서 비슷한 말로 '교통'(서로 오고 감. 또는 소식이나 정보를 주고받음), 교류, 왕래 등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그 주어는 사람이나 소식, 정보인 것 같다.
교통의 요충지에 사람이 많이 오가면 자연히 소문, 소식이 떠돌고, 정보가 유통되기 마련이니 이 현상을 한 단어로 지칭할 만한 것이다.
그러한 소통(1)의 장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2)일 것이다. 즉,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에 가서 정보를 캐내려 해봤자, 말이 통하지 않으면 알아듣지도 못하며 맥락을 모르면 오해하기 마련이다.

영어로 communicate는 (특성, 기분, 정보 등을) '전하다, 주다'의 뜻으로 1520년대부터 쓰였다 한다.
이는 라틴어 communicare 즉 '나누다, 알려주다, 공통되게(common) 만들다'에서 온 말이다.

한자로 소통(疏通)은 소통할/트일 疏에 통할 通을 쓴다.
疏는 발 소(疋) 자와 깃발 류(㐬) 자가 결합한 모습으로, 㐬의 본래 뜻인 '떠내려가다', '흐르다'에 발을 뜻하는 疋가 더해져 '길을 가는 것이 물 흐르듯 순조롭다, 막힘이 없다'라는 뜻이다.
通은 쉬엄쉬엄 갈 착(辶)에 길 용(甬)이 결합한 모습으로, 甬은 고리가 있는 종을 뜻하여 通은 원래 '(속이 텅 빈 종처럼 뻥 뚫린) 곧게 뻗은 길'을 뜻한다.
길이 뚫려있으니 이동하기 수월하고 거침이 없다는 뜻에서 '통하다, 내왕하다'라는 뜻이 되었다 한다.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은 서로의 촉수를 연결하여 직접 교감한다. 인간으로 따지면 뇌 속의 뉴런을 연결하여 타인의 생각과 내 생각을 '동기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완전한 동기화, 완전한 공감 상황에서는 말도 글도 어떤 소통의 수단도 필요 없겠지만, 인간에게는 나비족의 촉수가 없다.
인간의 의사전달 과정에서 오해와 잡음은 끊이지 않는다. 상황과 맥락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잘못 보낸 글자 하나 탓에, 또는 음질이 안 좋아서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이렇듯 나의 뜻을 타인에게 100% 곧이곧대로 전달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오해를 최대한 줄이는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공유해야 한다.

소통은 왜 어려운가? 오해를 줄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 메시지를 최대한 자세히 전달한다고 해 보자. 괜히 TMI라고 느껴져 오해의 소지를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메시지를 너무 간결하게 전달하면? 권위적이고 차가운 인상을 줄 수 있다.
결국 나의 메시지 하나하나는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나라는 인간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이고, 그 이미지를 해석하는 것은 청자이기에, 오해의 소지를 100% 차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소통은 '타자' 간에 일어나는 일이기에 이러한 한계는 필연적이다.

최대한 나를 잘 이해해주는 사람들, 오직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소통만 하고 산다면 어떨까?
계속해서 비슷한 이야기만 이어질 것이다.
오해도 줄고 내 말이 알아서 잘 이해되겠지만, 그런 삶에서 의미나 재미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늘 비슷한 자리에서 맴돌 뿐이다.
낯선 사람, 나와 성장 및 생활 배경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할수록 더욱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과는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렵고 만나더라도 공감대를 찾기가 어렵다. 오해가 생길 위험도 크다.
즉, 개인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큰 오해를 감수해야만 정말로 의미 있는 소통을 할 수 있다. 소통의 딜레마다.

조직 내부의 소통은 어떤가?
직급에 따라 기대하는 소통의 범주와 내용이 다름은 물론, 관심사나 삶의 목표도 다르다. 오해가 적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러한 오해를 감수하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 때 정말로 의미 있는 소통, 조직의 혁신을 지향하는 소통을 할 수 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 든다면, 그래서 말 통하는 사람끼리만 뭉친다면, 그 조직은 발전이 없다.
그러니 앞으로 공동체의 문제 원인으로 '소통의 부재'를 지적할 때는 그 앞에 '진짜'라는 말 한 마디를 붙이자.
큰 오해를 감수하는 진짜 소통만이 조직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0629

공동체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꼭 '소통의 부재' 탓을 하곤 한다.

마치 소통만 되면 만사 오케이라는 식이다. 그런데 꼭 소통을 해야 화합할 수 있을까?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잖아'라는 가사처럼 이심전심할 수는 없을까?

소통이 무엇이기에 너도나도 그 필요성은 외치면서도 막상 나서기를 꺼리는 걸까?

 

소통은 오해 없는 것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1)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2)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다.

두 번째 의미는 흔히 말하는 '의사소통' 즉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함'과 같은 뜻으로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의미이다.

한편 첫 번째 의미는 주어가 없어 무엇이 잘 통한다는 말인지 확실치 않다.

그런데 사전에서 비슷한 말로 '교통'(서로 오고 감. 또는 소식이나 정보를 주고받음), 교류, 왕래 등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그 주어는 사람이나 소식, 정보에 한정되는 것 같다.

교통의 요충지에 사람이 많이 오가면 자연히 소문, 소식이 떠돌고, 정보가 유통되기 마련이니 이 현상을 한 단어로 지칭할 만한 것이다.

그러한 소통(1)의 장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2)일 것이다. 즉,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에 가서 정보를 캐내려 해봤자, 말이 통하지 않으면 알아듣지도 못하며 맥락을 모르면 오해하기 마련이다.

 

한자와 영어에서의 '소통'

영어로 communicate는 (특성, 기분, 정보 등을) '전하다, 주다'의 뜻으로 1520년대부터 쓰였다 한다.

이는 라틴어 communicare 즉 '나누다, 알려주다, 공통되게(common) 만들다'에서 온 말이다.

한자로 소통(疏通)은 소통할/트일 疏에 통할 通을 쓴다.

疏는 발 소(疋) 자와 깃발 류(㐬) 자가 결합한 모습으로, 㐬의 본래 뜻인 '떠내려가다', '흐르다'에 발을 뜻하는 疋가 더해져 '길을 가는 것이 물 흐르듯 순조롭다, 막힘이 없다'라는 뜻이다.

通은 쉬엄쉬엄 갈 착(辶)에 길 용(甬)이 결합한 모습으로, 甬은 고리가 있는 종을 뜻하여 通은 원래 '(속이 텅 빈 종처럼 뻥 뚫린) 곧게 뻗은 길'을 뜻한다.

길이 뚫려있으니 이동하기 수월하고 거침이 없다는 뜻에서 '통하다, 내왕하다'라는 뜻이 되었다 한다.

 

인간 소통의 한계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은 서로의 촉수를 연결하여 직접 교감한다. 인간으로 따지면 뇌 속의 뉴런을 연결하여 타인의 생각과 내 생각을 '동기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완전한 동기화, 완전한 공감 상황에서는 말도 글도 어떤 소통의 수단도 필요 없겠지만, 인간에게는 나비족의 촉수가 없다.

인간의 의사전달 과정에서 오해와 잡음은 끊이지 않는다. 상황과 맥락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잘못 보낸 글자 하나 탓에, 또는 음질이 안 좋아서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이렇듯 나의 뜻을 타인에게 100% 곧이곧대로 전달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오해를 최대한 줄이는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공유해야 한다.

소통은 왜 어려운가? 오해를 줄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 메시지를 최대한 자세히 전달한다고 해 보자. 괜히 TMI라고 느껴져 오해의 소지를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메시지를 너무 간결하게 전달하면? 권위적이고 차가운 인상을 줄 수 있다.

결국 나의 메시지 하나하나는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나라는 인간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이고, 그 이미지를 해석하는 것은 청자이기에, 오해의 소지를 100% 차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소통은 '타자' 간에 일어나는 일이기에 이러한 한계는 필연적이다.

 

소통의 딜레마

최대한 나를 잘 이해해주는 사람들, 오직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소통만 하고 산다면 어떨까?

계속해서 비슷한 이야기만 이어질 것이다.

오해도 줄고 내 말이 알아서 잘 이해되겠지만, 그런 삶에서 의미나 재미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늘 비슷한 자리에서 맴돌 뿐이다.

낯선 사람, 나와 성장 및 생활 배경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할수록 더욱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과는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렵고 만나더라도 공감대를 찾기가 어렵다. 오해가 생길 위험도 크다.

즉, 개인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큰 오해를 감수해야만 정말로 의미 있는 소통을 할 수 있다. 소통의 딜레마다.

 

조직 내부의 소통

조직 내부의 소통은 어떤가?

직급에 따라 기대하는 소통의 범주와 내용이 다름은 물론, 관심사나 삶의 목표도 다르다. 오해가 적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러한 오해를 감수하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 때 정말로 의미 있는 소통, 조직의 혁신을 지향하는 소통을 할 수 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 든다면, 그래서 말 통하는 사람끼리만 뭉친다면, 그 조직은 발전이 없다.

큰 오해를 감수하는 진짜 소통, 대담한 소통만이 조직을 발전시킨다.


그래서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은? 

소통이란 오해 없이 의사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직접 뇌를 동기화할 수단이 없으므로 오해 없는 이상적 소통이란 불가능하다.

그나마 나와 비슷한 경험과 삶을 공유하는 사람들에 한정하여 소통하며 산다면 오해는 적겠지만, 성장과 혁신을 바라기는 어렵다.

큰 오해를 감수하고도 대담하게 소통해보려 노력해야만 혁신을 지향할 수 있다.

20220324-원칙 (8월업로드)

posted Mar 24, 2022, 11:53 AM by hyoo@crevate.com   [ updated Jun 30, 2022, 12:05 PM by Sung Youn PAK]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원칙들과 마주한다.
누군가는 '원칙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라고, 다른 누군가는 '원칙은 깨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떤 원칙은 지켜야 하고, 어떤 것은 깨도 되는 것일까? 원칙이란 무엇이길래 우리를 구속하는 것일까?

원칙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행동이나 이론 따위에서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이다.
(https://ko.dict.naver.com/#/entry/koko/18ac387827734c2099bdc7add4eb969a)

또 철학에서 원칙이란 '다른 여러 명제가 도출되는 기본 논제'라 한다. 그런데 이 정의를 파고들면 철학이나 수학의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하므로, 여기서는 일상적 의미의 원칙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너는 너무 원칙만 고수해',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라는 문장에서 쓰이는 바로 그 원칙이다.
원칙은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이라 했다. 일관됨은 한결같음, 즉 변함없음을 말하고, '원칙'의 유의어이기도 한 '규칙'이나 '법칙'은 각각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지키기로 작정한 법칙',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규범'을 말한다. 몹시 동어반복적인데, '규범'이란 '인간이 행동하거나 판단할 때에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가치 판단의 기준'이다. 돌고 돌아 '기준'으로 귀결됐다. 결국 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할 기준인 셈이다.
누군가 어떤 가상의 선을 그어두고, 이를 넘어서면 안 되고 반드시 이쪽에 있어야만 한다고 정해두었다. 그냥 기준도 아니고 반드시 지켜야 할 기준이니 몹시 중요한 기준인 모양이다.

원칙의 사전적 정의만을 보면 예외는 허용되지 않는 엄격한 기준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원칙이 있으면 늘 예외도 있다'라고 생각한다. 이는 아무래도 원칙이 현실에 적용될 때, 불가피하게 현실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즉 현실은 너무나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해서, 원칙이 아무리 엄격한 기준(진하게 그어둔 선)이라 할지라도 현실의 모든 측면을 제어할 수 없다. 이때 예외가 발생한다. 즉 원칙 자체가 예외를 창출하지는 않지만, 원칙이 현실에 적용되는 순간 예외가 산출되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예외가 쌓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또 다른 원칙이 될 수도 있다.

한자로 원칙(原則)은 근원 원(原)에 법칙 칙(則)을 쓴다.
原은 기슭 엄(厂)에 샘 천(泉)이 결합한 자로, 돌 틈새에서 물이 솟아 나오는 모습(泉)이 있는 기슭이니 '물길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사물의 시초'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한다. 則은 본래 조개(貝)가 아니라 솥 정(鼎)을 쓰던 자인데,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솥은 신성함을 상징했다. 이렇게 신성한 솥에 칼(刀)로 문자를 새겨 넣으니, 그 문자는 신과의 소통을 위한 글귀, 즉 '법칙'을 의미했다 한다.

'원칙'에 해당하는 영단어로 우리말 사전에서는 '원리' principle, '규칙' rule이 소개된다. principle은 principal과 어원이 같고 14세기경부터 '근원, 시작' 또는 '통치행위'의 의미로 쓰였다 한다. rule은 1200년경 '근원적 통치행위 또는 반드시 따라야 할 공식'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한다.
(https://www.etymonline.com/search?q=principle)

잘 지켜지는 원칙과 그렇지 않은 원칙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적용되는 범위가 극히 한정적인 (현실의 작은 부분만을 제어하는) 원칙의 경우 통제력이 높아 예외가 발생할 가능성이 적다. 반면 넓은 범위를 제어하는 규칙일수록 통제력이 낮다. 사회 곳곳에서 도덕적 원칙들이 잘 지켜지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도덕적 원칙은 孝이지만, 사람마다 효를 실천하는 정도는 다르다. 한편, 원칙의 구체성을 탓할 수도 있다. 부모님께 얼마나 해드려야 효인지 명확하지 않으니 통제력이 낫다는 것이다. 또는 원칙의 관리자들이 부재하거나 나태함을 탓할 수도 있다. 국가든 학교든 가정이든 효를 실천하라고 강조하는 사람이나 효행을 감독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원칙의 통제력은 대부분 '원칙의 관리자들'의 행실에 좌우된다. 관리자들이 원칙을 잘 알고 있으며 감독을 부지런히 하는 경우, 원칙은 대체로 잘 지켜진다. 원칙을 지켜야 할 이들에게 원칙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 마주치는 것은 권위를 지닌 감시자들뿐이다. 그러므로 원칙을 둘러싸고 지배와 복종 관계 성립은 불가피한데, 원칙의 관리자들이 곧 원칙을 지켜야 할 이들인 경우가 가장 이상적이다. 즉 감시자들이 스스로 원칙을 잘 지키며, 원칙을 지켜야 할 이들이 원칙을 직접 관리할 수 있는 상태, '자율'이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원칙은 언제 수정될 수 있을까? 혹은, 어떤 경우에 기존의 원칙을 수정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 새로운 원칙을 추가하거나 구체화해야 할까?
현실과 맞지 않을 때? 관리자들이 원할 때? 아니면 원칙을 지켜야 할 이들이 원할 때?
이때야말로 일반적인 원칙을 찾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것이 '원칙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원칙과 예외의 관계를 조율하고, 원칙의 통제성을 평가하고, 원칙을 만들고 바꾸고 지우는 일련의 과정조차 어떤 원칙을 따르기 마련이다. 즉 우리는 원칙을 따르면서 '원칙의 원칙'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원칙의 원칙'은 원칙뿐 아니라 예외도 규율하므로, 우리는 종종 불합리한 원칙 자체보다도 '원칙의 원칙'에 불만을 지닌다.

원칙의 원칙 중 대표적인 것이 직장 문화이다. 직장에 암묵적인 원칙으로 '식사 자리에서는 막내가 수저를 깐다'가 있다고 해보자. 막내는 이 원칙에 불만을 지닐 수 있다. 여기에서, 직장 문화에 따라 막내의 운명이 결정된다. 만약 자유로운 분위기의 직장이라면 막내는 이 원칙이 불합리하다고 상사에게 보고해서 고칠 것이다. 그렇지 못한 직장이라면 막내는 후배가 들어올 때까지 꾹 참고 수저를 깔아야 할 것이다. 결국 원칙은 수정되지 않는다. 이때 '서열과 관련된 암묵적인 원칙에 관해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의 원칙'은 그 통제력을 과시한다.

[2] 글쓰기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원칙들과 마주한다.
누군가는 '원칙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라고, 다른 누군가는 '원칙은 깨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떤 원칙은 지켜야 하고, 어떤 것은 예외가 허용될까? 원칙이란 무엇이길래 우리를 구속하는 것일까?

원칙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행동이나 이론 따위에서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이다.
또 철학에서 원칙이란 '다른 여러 명제가 도출되는 기본 논제'라 한다.
그런데 이 정의를 파고들면 철학이나 수학의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하므로, 여기서는 일상적 의미의 원칙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너는 너무 원칙만 고수해',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라는 문장에서 쓰이는 바로 그 원칙 말이다.

원칙은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이다.
일관됨은 한결같음, 즉 변함없음을 말하고, '원칙'의 유의어이기도 한 '규칙'이나 '법칙'은 각각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지키기로 작정한 법칙',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규범'을 말한다.
몹시 동어반복적인데, '규범'이란 '인간이 행동하거나 판단할 때에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가치 판단의 기준'이다.
돌고 돌아 '기준'으로 귀결됐다. 결국 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할 기준인 셈이다.
누군가 어떤 가상의 선을 그어두고, 이를 넘어 저쪽으로 가면 안 되고 반드시 이쪽에 있어야만 한다고 정해둔 것이다.

원칙의 사전적 정의만을 보면 예외는 허용되지 않는 엄격한 기준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원칙이 있으면 늘 예외도 있다'라고 생각한다.
원칙이 현실에 적용될 때, 불가피하게 현실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즉 현실은 너무나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해서, 원칙이 아무리 엄격한 기준(진하게 그어둔 선)이라 할지라도 현실의 모든 측면을 제어할 수 없다. 이때 예외가 발생한다.
즉 원칙이 현실에 적용되는 순간 예외가 산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외가 쌓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또 다른 원칙이 될 수도 있다.

한자로 원칙(原則)은 근원 원(原)에 법칙 칙(則)을 쓴다.
原은 기슭 엄(厂)에 샘 천(泉)이 결합한 자로, 돌 틈새에서 물이 솟아 나오는 모습(泉)이 있는 기슭이니 '물길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사물의 시초'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한다.
則은 본래 조개(貝)가 아니라 솥 정(鼎)을 쓰던 자인데,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솥은 신성함을 상징했다.
이렇게 신성한 솥에 칼(刀)로 문자를 새겨 넣으니, 그 문자는 신과의 소통을 위한 글귀, 즉 '법칙'을 의미했다 한다.

'원칙'에 해당하는 영단어로 우리말 사전에서는 '원리' principle, '규칙' rule이 소개된다.
principle은 principal과 어원이 같고 14세기경부터 '근원, 시작' 또는 '통치행위'의 의미로 쓰였다 한다.
rule은 1200년경 '근원적 통치행위 또는 반드시 따라야 할 공식'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한다.

잘 지켜지는 원칙과 그렇지 않은 원칙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적용 범위가 극히 한정적인 (현실의 작은 부분만을 제어하는) 원칙의 경우 예외가 적으니 통제력은 높다.
반면 넓은 범위를 제어하는 규칙일수록 통제력이 낮다. 사회 곳곳에서 도덕적 원칙들이 잘 지켜지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도덕적 원칙은 孝이지만, 사람마다 효를 실천하는 정도는 다르다.
한편, 원칙의 구체성을 탓할 수도 있다.
부모님께 얼마나 해드려야 효인지 명확하지 않으니 통제력이 낫다는 것이다.
또는 원칙의 관리자들이 부재하거나 나태함을 탓할 수도 있다.
국가든 학교든 가정이든 효를 실천하라고 강조하는 사람이나 효행을 감독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원칙을 지켜야 할 이들에게 원칙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 마주치는 것은 권위를 지닌 감시자들뿐이다.
그래서 원칙을 둘러싸고 권력 관계가 형성되곤 한다.
따라서 원칙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권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이며, 불순분자로 낙인 찍히기 쉽다.

그럼에도 조직의 혁신을 위해 원칙은 때때로 수정되어야 한다.
낡은 원칙을 지키려다 위기를 관리하지 못해 조직이 무너지고 만다면, 그보다 주객전도된 상황은 없을 것이다.
혁신을 위해서는 누구나 원칙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불순분자를 자처하고 권력에 대들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조직 내에서 도전자, 혁신가를 찾기 어렵다면, 조직 밖에서라도 이식해야 한다.
법전을 난생 처음 펼쳐 본 사람이야말로 법의 불합리성을 읽어내고 지적할 수 있다.
'안 본 눈 삽니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0629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원칙들과 마주한다.

누군가는 '원칙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라고, 다른 누군가는 '원칙은 깨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떤 원칙은 지켜야 하고, 어떤 것은 예외가 허용될까? 원칙이란 무엇이길래 우리를 구속하는 것일까?


원칙은 꼭 지켜야 할 기준

원칙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행동이나 이론 따위에서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이다.

또 철학에서 원칙이란 '다른 여러 명제가 도출되는 기본 논제'라 한다.

그런데 이 정의를 파고들면 철학이나 수학의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하므로, 여기서는 일상적 의미의 원칙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너는 너무 원칙만 고수해',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라는 문장에서 쓰이는 바로 그 원칙 말이다.

원칙은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이다.

일관됨은 한결같음, 즉 변함없음을 말하고, '원칙'의 유의어이기도 한 '규칙'이나 '법칙'은 각각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지키기로 작정한 법칙',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규범'을 말한다.

몹시 동어반복적인데, '규범'이란 '인간이 행동하거나 판단할 때에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가치 판단의 기준'이다.

돌고 돌아 '기준'으로 귀결됐다. 결국 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할 기준인 셈이다.

누군가 어떤 가상의 선을 그어두고, 이를 넘어 저쪽으로 가면 안 되고 반드시 이쪽에 있어야만 한다고 정해둔 것이다.

 

예외가 생기는 원인

원칙의 사전적 정의만을 보면 예외는 허용되지 않는 엄격한 기준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원칙이 있으면 늘 예외도 있다'라고 생각한다.

원칙이 현실에 적용될 때, 불가피하게 현실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즉 현실은 너무나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해서, 원칙이 아무리 엄격한 기준이라 할지라도 현실의 모든 측면을 제어할 수 없다. 이때 예외가 발생한다.

즉 원칙이 현실에 적용되는 순간 예외가 산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외가 쌓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또 다른 원칙이 될 수도 있다.

 

한자와 영어에서의 '원칙'

한자로 원칙(原則)은 근원 원(原)에 법칙 칙(則)을 쓴다.

原은 기슭 엄(厂)에 샘 천(泉)이 결합한 자로, 돌 틈새에서 물이 솟아 나오는 모습(泉)이 있는 기슭이니 '물길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사물의 시초'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한다.

則은 본래 조개(貝)가 아니라 솥 정(鼎)을 쓰던 자인데,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솥은 신성함을 상징했다.

이렇게 신성한 솥에 칼(刀)로 문자를 새겨 넣으니, 그 문자는 신과의 소통을 위한 글귀, 즉 '법칙'을 의미했다 한다.

한편 '원칙'에 해당하는 영단어로 우리말 사전에서는 '원리' principle, '규칙' rule이 소개된다.

principle은 principal과 어원이 같고 14세기경부터 '근원, 시작' 또는 '통치행위'의 의미로 쓰였다 한다.

rule은 1200년경 '근원적 통치행위 또는 반드시 따라야 할 공식'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한다.

 

원칙의 통제력

잘 지켜지는 원칙과 그렇지 않은 원칙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적용 범위가 극히 한정적인 (현실의 작은 부분만을 제어하는) 원칙의 경우 예외가 적으니 통제력은 높다.

반면 넓은 범위를 제어하는 규칙일수록 통제력이 낮다. 사회 곳곳에서 도덕적 원칙들이 잘 지켜지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도덕적 원칙은 孝이지만, 사람마다 효를 실천하는 정도는 다르다.

한편, 원칙의 구체성을 탓할 수도 있다.

부모님께 얼마나 해드려야 효인지 명확하지 않으니 통제력이 낫다는 것이다.

또는 원칙의 관리자들이 부재하거나 나태함을 탓할 수도 있다.

국가든 학교든 가정이든 효를 실천하라고 강조하는 사람이나 효행을 감독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원칙과 권력

원칙을 지켜야 할 이들에게 원칙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 마주치는 것은 권위를 지닌 감시자들뿐이다.

그래서 원칙을 둘러싸고 권력 관계가 형성되곤 한다.

따라서 원칙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권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이며, 불순분자로 낙인 찍히기 쉽다.

 

혁신과 원칙

그럼에도 조직의 혁신을 위해 원칙은 때때로 수정되어야 한다.

낡은 원칙을 지키려다 위기를 관리하지 못해 조직이 무너지고 만다면, 그보다 주객전도된 상황은 없을 것이다.

혁신을 위해서는 누구나 원칙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불순분자를 자처하고 권력에 대들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조직 내에서 도전자, 혁신가를 찾기 어렵다면, 조직 밖에서라도 이식해야 한다.

법전을 난생 처음 펼쳐 본 사람이야말로 법의 불합리성을 읽어내고 지적할 수 있다.

'안 본 눈 삽니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은?

원칙은 '꼭 지켜야 할 기준'이다. 하지만 원칙이 복잡한 현실에 적용될 때는 늘 예외가 생긴다.

원칙에 통제력이 있으려면 감시자들이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하므로 피감시자들과의 권력 관계가 생긴다.

원칙에 도전하는 것은 이 권력에 도전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 도전자나 혁신가가 생기기 어렵다.

혁신을 아웃소싱하거나 '오픈 이노베이션'을 추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220322-행복 (7월업로드)

posted Mar 22, 2022, 12:59 PM by hyoo@crevate.com   [ updated Jun 30, 2022, 12:04 PM by Sung Youn PAK]


[1] 뼈대

삶의 목적을 물었을 때 '행복'이라 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 행복은 무엇인가요?'라고 재차 물으면 다양한 답이 나온다.
사랑, 화목, 돈, 건강... 어떤 이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고 살아간다'라며 능글맞게 넘기기도 한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하지만 행복으로 가는 수단은 각자 다르다. 도대체 '삶의 목적' 그 자체라는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의 의미를 안다면, 삶의 의미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행복의 사전적 정의는 '1)복된 좋은 운수' '2)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이다.
(https://ko.dict.naver.com/#/entry/koko/e09fbb20489549e9ba9832d610b9a680)

1번 의미의 '행복'은 "나는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와 같이 '행운'과 같은 뜻이다. 이때 '운수'는 '이미 정해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과 기수'를 뜻하므로, 요즘 말로 풀어 쓰면 "나는 그녀가 하는 일이 다 잘 되기를 빌었다." 정도가 된다. 나든 그녀든, 인간의 힘으로는 그녀의 운수를 조작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니 그저 신이나 초월적 존재에게 기도할 따름인 것이다. 행복의 운명론적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좀 더 익숙한 의미는 2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의미를 설명할 때 '만족'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흐뭇하다'는 '마음에 흡족하여 매우 만족스럽다'라는 말이고, '기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이나 느낌'이다. 넉넉하다, 충분하다, 만족하다, 흡족하다 등등 동어반복적인 말들을 헤쳐나가다 보면, 행복은 한마디로 '살면서 느껴지는 반복적인 만족'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모호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 시사점은 있다. 첫째, 행복도 만족과 다름없이 어떤 기준이 있다. 단지 '좋은 기분'이라고 행복한 것은 아니며, 꼭 어떤 기준 이상이어야 한다. 둘째, 오직 한 순간이나 한 측면에서만 만족한다면 행복이 아니다. 예컨대 가정이 화목하지 않아 늘 불만족한 사람이 있는데 밥을 먹어서 식욕을 충족했다고 그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물론 여전히 모호하다. 행복이라 부르고자 만족해야만 할 기준들이 너무나 많고 제각기 성격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기준 가운데 사람마다, 상황마다 우선순위가 달라진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는 누군가 '행복하다'라고 말했을 때 그의 성격, 신분, 상황 등을 고려해 그가 어떤 기준들을 충족한 상태가 되었는지를 대개 예측할 수는 있다.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다면, 그는 방금 배불리 먹었거나 한동안 먹을 음식을 비축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행복하다'라고 말했다면 그는 국가의 큰 과제를 달성했거나 국민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을 것이다. 이렇듯 행복을 이해하려면 그 인간의 삶을 파고들어야 한다. 행복이 삶의 절대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행복의 여부가 삶의 기준을 드러내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happy의 어원이 되는 대다수의 유럽 단어들은 처음에 lucky, 즉 운이 좋음을 의미했다고 한다. '행운'을 뜻하는 hap에 -y를 붙여 형용사로 만든 것이다. 14세기 말엽에야 '매우 기쁜'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참고로 hap은 '우연히 일어나다'라는 뜻의 동사로도 쓰였고 지금은 happen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https://www.etymonline.com/search?q=happy)
유럽에서 happy의 의미 변화는 마치 우리나라 사전의 '행복'의 1번 의미가 2번 의미로 변화해 간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기쁜 감정, 혹은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의 원인을 초월적 존재에게 돌리는 운명론적인 어휘가 점차 그 상태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행복(幸福)은 다행할 행幸에 복 복福을 쓴다. 幸은 양손을 묶은 수갑과 벽에 고정하는 쇠사슬을 본뜬 문자라 한다. 지배계층의 관점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을 잡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福은 제단(示)쪽으로 술잔(畐)에 든 술을 따르는 모습을 본뜬 문자로, 신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복을 기원하기 위함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죄인을 잡아(幸) 벌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려 복(福)을 비는 모습은 분명 옛 동아시아 고위층의 삶에 중요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행복과 비슷한 말로 사전에서는 '복'(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 '열락'(기뻐하며 즐거워함); '기쁨'(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이나 느낌)을 제시한다. 한편 행복의 반대말은 물론 불행이다.

개인의 관점에서 행복의 기준을 세우는 데에 가장 중요한 근거가 욕구이다. 매슬로우에 따르면 인간의 5대 욕구는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가 있으며, 순서대로 가장 기초적 욕구부터 차례대로 만족하려 한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은 하루에도 수백 가지씩 떠오르는 욕구들을 마주하며, 그들의 우선순위를 조금씩 조정한다고 보는 편이 현실에 더 맞을 것 같다. 또 욕구와는 상관없이 습관화, 일상화된 행위들이 있어서 이 행위를 하느라 욕구를 잠시 제쳐 두기도 한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개인들은 보통 한두 가지의 욕구에 온전히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는 불행하다. 행복하고 싶다'라고 말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앞서 말했듯 그의 성격, 신분, 상황을 고려해 그가 어떤 측면에서 불만족스러운지 추론하여 조언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자면 된다. 하지만 행복의 기준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욕구이고, 인간은 하루에도 수백 번 욕구들의 우선순위를 조절하며 산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어쩌면 그가 불행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욕구 컨트롤타워가 정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욕구 자체, 또는 욕구의 대상을 찾지 못하겠거나, 혹은 욕구의 우선순위 조절에 자꾸만 실패하거나(다이어트 중인데 식욕을 참지 못하거나), 이런 경우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행복은 기준 충족의 문제이고, 특히 개인에게는 욕구 조절 및 달성의 문제이다. 시험에 떨어지기는 쉽지만 붙기는 어렵듯이, 불행해지기는 쉽고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행복, 즉 '반복 가능한 만족'을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자기 욕구 조절 장치를 점검해야 한다. 이 과정 자체가 지난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죄인을 구속하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2] 글쓰기

삶의 목적을 물었을 때 '행복'이라 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 행복은 무엇인가요?'라고 재차 물으면 다양한 답이 나온다. 사랑, 건강, 돈, 화목...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하지만 행복으로 가는 수단은 각자 다른 것이다.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의 사전적 정의는 '1)복된 좋은 운수' '2)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이다.

1번 의미의 '행복'은 "나는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라는 예문처럼 '행운'과 같은 뜻이다.
'행운'은 '좋은 운수'와 같고, '운수'는 '이미 정해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과 기수'를 뜻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그녀의 운수를 조작할 수 없으니 초월적 존재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행복의 운명론적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의미는 2번이다.
흥미롭게도 행복의 의미를 설명할 때 '만족'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흐뭇하다'는 '마음에 흡족하여 매우 만족스럽다'라는 말이고, '기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이나 느낌'이다.
사전의 페이지를 넘기며 '넉넉하다, 충분하다, 만족하다, 흡족하다' 등등 동어반복적인 말들을 헤쳐나가다 보면, 행복은 한마디로 '살면서 느껴지는 반복적인 만족'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의 의미는 여전히 모호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 시사점은 있다.
첫째, 행복도 만족과 다름없이 어떤 기준이 있다. 단지 '좋은 기분'이라고 행복한 것은 아니며, 꼭 어떤 기준 이상이어야 한다.
둘째, 오직 한 순간이나 한 측면에서만 만족한다면 행복이 아니다.
예컨대 가정이 화목하지 않아 늘 불만족한 사람이 있는데 밥을 먹어서 식욕을 충족했다고 그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happy의 어원이 되는 대다수의 유럽 단어들은 처음에 lucky, 즉 운이 좋음을 의미했다고 한다.
'행운'을 뜻하는 hap에 -y를 붙여 형용사로 만든 것이다. 14세기 말엽에야 '매우 기쁜'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참고로 hap은 '우연히 일어나다'라는 뜻의 동사로도 쓰였고 지금은 happen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유럽에서 happy의 의미 변화는 마치 우리나라 사전의 '행복'의 1번 의미가 2번 의미로 변화해 간 것처럼 보인다.
기쁜 감정이나 상황의 원인을 초월적 존재에게 돌리는 운명론적인 어휘가 점차 그 결과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행복(幸福)은 다행할 행幸에 복 복福을 쓴다.
幸은 양손을 묶은 수갑과 벽에 고정하는 쇠사슬을 본뜬 문자라 한다.
지배계층의 관점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을 잡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福은 제단(示)쪽으로 술잔(畐)에 든 술을 따르는 모습을 본뜬 문자로, 신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복을 기원하기 위함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죄인을 잡아(幸) 벌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려 복(福)을 비는 모습은 분명 옛 동아시아 고위층의 삶에 중요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행복과 비슷한 말로 사전에서는 '복'(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 '열락'(기뻐하며 즐거워함), '기쁨'(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이나 느낌) 등을 제시한다,
행복의 반대말은 물론 불행이다.

개인의 관점에서 행복의 기준을 세우는 데에 가장 중요한 근거가 욕구이다.
매슬로우에 따르면 인간의 5대 욕구는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가 있으며, 순서대로 가장 기초적 욕구부터 차례대로 만족하려 한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은 하루에도 수백 가지씩 떠오르는 욕구들을 마주하며, 그들의 우선순위를 조금씩 조정한다고 보는 편이 현실에 더 맞을 것 같다.
또 욕구와는 상관없이 습관화, 일상화된 행위들이 있어서 이 행위를 하느라 욕구를 잠시 제쳐 두기도 한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개인들은 보통 한두 가지의 욕구에 온전히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는 불행하다. 행복하고 싶다.'라고 말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의 기준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욕구이고, 인간은 하루에도 수백 번 욕구들의 우선순위를 조절하며 산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어쩌면 그가 불행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욕구 컨트롤타워가 정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다.
그의 욕구 컨트롤타워는 왜 고장 난 것일까?
욕구가 향할 적절한 대상을 찾지 못하거나, 혹은 욕구의 우선순위 조절에 자꾸 실패하여 자신감을 잃었을 수도 있다.

행복은 반복적인 만족이기에, 기준 충족의 문제이고, 특히 개인에게는 욕구 조절의 문제이다.
시험에 떨어지기는 쉽지만 붙기는 어렵듯이, 불행해지기는 쉽고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결국 행복을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자기 욕구 조절 장치를 점검해야 한다.


0629

삶의 목적을 물었을 때 '행복'이라 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 행복은 무엇인가요?'라고 재차 물으면 다양한 답이 나온다. 사랑, 건강, 돈, 화목...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하지만 행복으로 가는 수단은 각자 다른 것이다.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의 운명론적 측면

행복의 사전적 정의는 '1)복된 좋은 운수' '2)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이다.

1번 의미의 '행복'은 "나는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라는 예문처럼 '행운'과 같은 뜻이다.

'행운'은 '좋은 운수'와 같고, '운수'는 '이미 정해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과 기수'를 뜻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그녀의 운수를 조작할 수 없으니 초월적 존재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행복의 운명론적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행복은 반복적인 만족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의미는 2번이다. 사전에서 행복의 의미를 설명할 때는 '만족'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흐뭇하다'는 '마음에 흡족하여 매우 만족스럽다'라는 말이고, '기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이나 느낌'이다.

사전의 페이지를 넘기며 '넉넉하다, 충분하다, 만족하다, 흡족하다' 등등 동어반복적인 말들을 헤쳐나가다 보니,

행복은 한마디로 '살면서 느껴지는 반복적인 만족'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은 다양한 기준을 반복적으로 충족하는 것

여전히 행복의 의미는 모호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 시사점은 있다.

첫째, 행복도 만족과 다름없이 어떤 기준이 있다. 단지 '좋은 기분'이라고 행복한 것은 아니며, 꼭 어떤 기준 이상이어야 한다. 

둘째, 오직 한 순간이나 한 측면에서만 만족한다면 행복이 아니다. 

예컨대 가정이 화목하지 않아 불행한 사람이 있는데 밥을 먹어서 식욕을 충족했다고 행복해졌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행복은 총체적인 판단의 문제이다. 

 

happy의 의미 확장

happy의 어원이 되는 대다수의 유럽 단어들은 처음에 lucky, 즉 운이 좋음을 의미했다고 한다.

'행운'을 뜻하는 hap에 -y를 붙여 형용사로 만든 것이다. 14세기 말엽에야 '매우 기쁜'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참고로 hap은 '우연히 일어나다'라는 뜻의 동사로도 쓰였고 지금은 happen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유럽에서 happy의 의미 변화는 마치 우리나라 사전의 '행복'의 1번 의미가 2번 의미로 변화해 간 것처럼 보인다.

기쁜 감정이나 상황의 원인을 초월적 존재에게 돌리는 운명론적인 어휘가 점차 그 결과 자체를 뜻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행복은 신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내가 개척해나가는 것이라는 사고가 발달하면서 어휘의 의미도 확장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자로 '행복'은 옛 동아시아 고위층의 행복

한자로 행복(幸福)은 다행할 행幸에 복 복福을 쓴다.

幸은 양손을 묶은 수갑과 벽에 고정하는 쇠사슬을 본뜬 문자라 한다.  라 한다는 최소화시키면 어떨지? 뭔가 확신이 없는 사람 처럼 보여서...

지배계층의 관점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을 잡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福은 제단(示)쪽으로 술잔(畐)에 든 술을 따르는 모습을 본뜬 문자로, 신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복을 기원하기 위함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죄인을 잡아(幸) 벌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려 복(福)을 비는 모습은 분명 옛 동아시아 고위층의 삶에 중요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한편, 행복과 비슷한 말로 사전에서는 '복'(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 '열락'(기뻐하며 즐거워함), '기쁨'(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이나 느낌) 등을 제시한다. 행복의 반대말은 물론 불행이다.

 

행복의 중요한 기준은 욕구

개인의 관점에서 행복의 기준을 세우는 데에 가장 중요한 근거가 욕구이다.

매슬로우에 따르면 인간의 5대 욕구는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가 있으며, 순서대로 가장 기초적 욕구부터 차례대로 만족하려 한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은 하루에도 수백 개 이상 떠오르는 욕구들을 마주하며, 그들의 우선순위를 조금씩 조정한다고 보는 편이 현실에 더 맞을 것 같다.

또 욕구와는 상관없이 습관화, 일상화된 행위들이 있어서 이 행위를 하느라 욕구를 잠시 제쳐 두기도 한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개인들은 보통 한두 가지의 욕구에 온전히 지배 당하지 않는다.

 

불행은 컨트롤타워의 고장

그렇다면 누군가 '나는 불행하다. 행복하고 싶다.'라고 말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의 기준은 곧 욕구이고, 인간은 하루에도 수백 번 욕구들의 우선순위를 조절하며 산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어쩌면 그가 불행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욕구 컨트롤타워(지휘체계)가 정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다.

그의 욕구 컨트롤타워는 왜 고장 난 것일까?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의욕이 없거나, 욕구가 향할 적절한 대상(목표)을 찾지 못하거나,

혹은 욕구의 우선순위 조절에 자꾸 실패하여(ex. 다이어트 중 폭식, 야식...) 자신감을 잃었을 수도 있다.


행복해지려면 점검하고 훈련해야

행복은 반복적인 만족이기에, 기준 충족의 문제이고, 특히 개인에게는 욕구 조절의 문제이다.

행복을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자기 욕구 조절 장치를 점검해야 한다.

한때 행복을 위해 위로, 힐링을 강조한 책들이 많이 출간된 적이 있다.

하지만 해결책 없이 그저 쓰담쓰담해주기만 한다면 잠시 고통을 잊을 수는 있겠지만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행복은 지속적인 만족이므로 행복해지려면 총체적인 솔루션이 필요하다.

지나친 기대 버리기, 증오 버리기 연습과 같이 여러 종교들에서 강조하는 방법들은 결국 욕구 조절 장치를 점검하고, 훈련하는 과정이다.

꼭 초월적 존재에게서 그 근거를 찾지 않더라도 내 운명 개척의 관점에서 취사선택하여 시도해볼 수도 있다.


그래서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은?

행복은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처럼 보이지만 결국 만족의 확장판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다양한 기준을 반복적으로 충족하는 것'이다. 앞에서 나온 두 가지 시사점도 추가하는 게 좋지 않을지? 

개인의 관점에서 행복은 기준 충족의 문제이고, 기준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욕구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욕구의 우선순위를 조절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살려면 때때로 욕구 조절 장치를 점검하고 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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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적을 물었을 때 '행복'이라 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 행복은 무엇인가요?'라고 재차 물으면 다양한 답이 나온다. 사랑, 건강, 돈, 화목...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하지만 행복으로 가는 수단은 각자 다른 것이다.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의 운명론적 측면

행복의 사전적 정의는 '1)복된 좋은 운수' '2)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이다.

1번 의미의 '행복'은 "나는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라는 예문처럼 '행운'과 같은 뜻이다.

'행운'은 '좋은 운수'와 같고, '운수'는 '이미 정해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과 기수'를 뜻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그녀의 운수를 조작할 수 없으니 초월적 존재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행복의 운명론적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행복은 반복적인 만족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의미는 2번이다. 사전에서 행복의 의미를 설명할 때는 '만족'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흐뭇하다'는 '마음에 흡족하여 매우 만족스럽다'라는 말이고, '기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이나 느낌'이다.

사전의 페이지를 넘기며 '넉넉하다, 충분하다, 만족하다, 흡족하다' 등등 동어반복적인 말들을 헤쳐나가다 보니,

행복은 한마디로 '살면서 느껴지는 반복적인 만족'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은 다양한 기준을 반복적으로 충족하는 것

여전히 행복의 의미는 모호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 시사점은 있다.

첫째, 행복도 만족과 다름없이 어떤 기준이 있다.

단지 '좋은 기분'이라고 행복한 것은 아니며, 꼭 어떤 기준 이상이어야 한다. 

둘째, 행복은 단편적 문제가 아니라 복합적, 총체적인 문제이다. 

예컨대 가정이 화목하지 않아 불행한 사람이 있는데 밥을 먹어서 식욕을 충족했다고 행복해졌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happy의 의미 확장

happy의 어원이 되는 대다수의 유럽 단어들은 처음에 lucky, 즉 운이 좋음을 의미했다고 한다.

'행운'을 뜻하는 hap에 -y를 붙여 형용사로 만든 것이다. 14세기 말엽에야 '매우 기쁜'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참고로 hap은 '우연히 일어나다'라는 뜻의 동사로도 쓰였고 지금은 happen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유럽에서 happy의 의미 변화는 마치 우리나라 사전의 '행복'의 1번 의미가 2번 의미로 변화해 간 것처럼 보인다.

기쁜 감정이나 상황의 원인을 초월적 존재에게 돌리는 운명론적인 어휘가 점차 그 결과 자체를 뜻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행복은 신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내가 개척해나가는 것이라는 사고가 발달하면서 어휘의 의미도 확장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자로 '행복'은 옛 동아시아 고위층의 행복

한자로 행복(幸福)은 다행할 행幸에 복 복福을 쓴다.

幸은 양손을 묶은 수갑과 벽에 고정하는 쇠사슬을 본뜬 문자이다.

지배계층의 관점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을 잡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의미이다.

福은 제단(示)쪽으로 술잔(畐)에 든 술을 따르는 모습을 본뜬 문자로, 신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복을 기원하기 위함이라는 의미이다.

죄인을 잡아(幸) 벌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려 복(福)을 비는 모습은 분명 옛 동아시아 고위층의 삶에 중요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한편, 행복과 비슷한 말로 사전에서는 '복'(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 '열락'(기뻐하며 즐거워함), '기쁨'(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이나 느낌) 등을 제시한다. 행복의 반대말은 물론 불행이다.

 

행복의 중요한 기준은 욕구

개인의 관점에서 행복의 기준을 세우는 데에 가장 중요한 근거가 욕구이다.

매슬로우에 따르면 인간의 5대 욕구는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가 있으며, 순서대로 가장 기초적 욕구부터 차례대로 만족하려 한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은 하루에도 수백 개 이상 떠오르는 욕구들을 마주하며, 그들의 우선순위를 조금씩 조정한다고 보는 편이 현실에 더 맞다.

또 욕구와는 상관없이 습관화, 일상화된 행위들이 있어서 이 행위를 하느라 욕구를 잠시 제쳐 두기도 한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개인들은 보통 한두 가지의 욕구에 온전히 지배 당하지 않는다.

 

불행은 컨트롤타워의 고장

그렇다면 누군가 '나는 불행하다. 행복하고 싶다.'라고 말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의 기준은 곧 욕구이고, 인간은 하루에도 수백 번 욕구들의 우선순위를 조절하며 산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가 불행을 느끼는 이유는 혹시 그의 욕구 컨트롤타워(지휘체계)가 정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다.

그의 욕구 컨트롤타워는 왜 고장 난 것일까?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의욕이 없거나, 욕구가 향할 적절한 대상(목표)을 찾지 못하거나,

혹은 욕구의 우선순위 조절에 자꾸 실패하여(ex. 다이어트 중 폭식, 야식...) 자신감을 잃었을 수도 있다.


행복해지려면 점검하고 훈련해야

행복은 반복적인 만족이기에, 기준 충족의 문제이고, 특히 개인에게는 욕구 조절의 문제이다.

행복을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자기 욕구 조절 장치를 점검해야 한다.

한때 행복을 위해 위로, 힐링을 강조한 책들이 많이 출간된 적이 있다.

하지만 해결책 없이 그저 쓰담쓰담해주기만 한다면 잠시 고통을 잊을 수는 있겠지만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행복은 지속적인 만족이므로 행복해지려면 총체적인 솔루션이 필요하다.

지나친 기대 버리기, 증오 버리기 연습과 같이 여러 종교들에서 강조하는 방법들은 결국 욕구 조절 장치를 점검하고, 훈련하는 과정이다.

꼭 초월적 존재에게서 그 근거를 찾지 않더라도 내 운명 개척의 관점에서 취사선택하여 시도해볼 수도 있다.


그래서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은?

행복은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처럼 보이지만 결국 만족의 확장판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따라서 행복도 만족과 다름없이 어떤 기준이 있다. 대신에 행복은 단편적 문제가 아니라 복합적, 총체적인 문제이다. 즉 행복은 '다양한 기준의 반복적 만족'이다.

개인의 관점에서 행복은 기준 충족의 문제이고, 기준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욕구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욕구의 우선순위를 조절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살려면 때때로 욕구 조절 장치를 점검하고 훈련해야 한다.

20220317-여유 (8월업로드)

posted Mar 17, 2022, 4:31 PM by hyoo@crevate.com   [ updated Jun 30, 2022, 11:59 AM by Sung Youn PAK]


[1] 뼈대

국가번호 82번, 대한민국은 '빨리빨리'의 나라이다.
늘 무언가에 쫓기듯이 살고, 버스를 기다리는 5분조차 길게 느끼는 한국인이 '여유를 가져라'라는 웰빙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는 몹시 어렵다.
절충하는 척이라도 해야겠는지, 누군가는 '천천히 빨리 해'라며 재촉한다.
우리는 언제쯤 여유롭게 살 수 있는가? 그 전에, 여유란 무엇일까?

여유의 사전적 의미는 1)'물질적, 공간적, 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나 2)'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 또는 대범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 마음의 상태'이다. (https://ko.dict.naver.com/#/entry/koko/14efd3e05a9b43d7899c691040e6ab53)
대체로 1번 의미의 여유, 즉 물질이든 시간이든 공간이든 남는다는 것을 알기에 2번 의미의 여유를 누리는 것일 테다. 여기서는 2번 의미 즉 여유로운 마음 상태에 주목해보자. 모든 것은 마음 먹기 달렸다는 말도 있잖은가. 돈이든 시간이든 공간이든 남아돌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마음만은 여유롭게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유餘裕는 남을 여餘에 넉넉할 유裕를 쓴다. 餘는 본래 '밥(食)이 남다'라는 뜻을 지녔던 형성 문자로서 지금은 일반적인 '남다'의 뜻으로 쓰인다. 裕는 본래 옷(衣)이 널찍한 골짜기(谷)처럼 '헐렁하다'라는 뜻을 지녔던 회의 문자로 지금은 성격이나 인품, 재산이 '너그럽다'라는 뜻이다. 밥이 남고 헐렁한 옷을 입으니, 한자어부터 풍채가 좋은 부자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영어로 '여유로운 태도'(relaxed manner)나 '집중을 늦추다'(relax concentration)라고 할 때 relax를 쓴다. relax는 14세기경 주로 약이나 근육과 관련되어 '덜 촘촘하고 빽빽하게 하다'라는 뜻이었고, 15세기경 '긴장을 풀다'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https://www.etymonline.com/search?q=relax)

사전에서는 유의어로 융통성, 여분, 여백 등을 제시한다.
융통성은 그때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 일을 처리하는 재주이다. 여유가 있다는 것은 융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아 남는 자원이 있으면, 꼭 기준에 정확히 맞추지 않더라도 그때그때 적절히 조정해가며 자원을 배분할 수 있다. 또한 결정권자로서 마음이 여유로우면(상황을 긴박하다고 판단하지 않으면) 꼭 규칙을 정확히 준수하기보다는 구성원들의 긴장을 풀어줄 수도 있다.
여분은 어떤 한도에 차고 남은 부분이요, 여백은 종이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남은 빈 자리이다. 빈 종이는 거기에 쓰인 글이나 그려진 그림 덕에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런데 글이나 그림의 테두리 바깥에도 여전히 칠해지지 않은 부분은 남기 마련이다. 그러면 그 부분은 다 오려내 버려도 될까? 아니다. 나중에 그림을 더 그릴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그렇게 남겨 두는 것이 오히려 그림을 돋보이게 할 수도 있다. 예술 작품에 관한 한 여백, 즉 종이에 두는 여유는 꼭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현실의 문제와는 달리 예술에서는 작품 자체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여유의 반대말은 찾기 어려운데, '여유가 있다'라는 말의 반대말을 생각해보면 '쪼들리다' '긴장이 된다', '부족하다' 정도가 있겠다. 즉 어떤 기준을 충족시킬지 확신하지 못하거나, 충족시키지 못함이 뻔한 상태에서 우리는 여유를 잃는다. 그리고 그 최소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이 지상 과제가 된다.

여유는 보통 어떤 기준을 전제한다. 그 기준을 충족시키고도 한참 남는 자원이 있을 때 우리는 여유롭다.
물론 객관적인 기준과는 관계없이 누군가는 습관적으로 또는 성격상 여유로울 수도 있다. 속으론 긴장했을지 몰라도 겉으로는 그것을 잘 숨기는 사람들이다.

목표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그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결코 여유로울 수 없을까?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서도 여유를 지닌다는 것, 일을 하면서도 여유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적절한 순간에 이완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매 순간 어떤 기준을 충족시키면서 살기는 어렵다. 우리는 '함량 미달'일 때가 훨씬 많다.
그럼에도 긴장을 풀 땐 풀어주어야 한다. 몇 시간이고 수축하고 긴장해 있는 근육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때로 자신에게 너그러워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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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쓰기

국가번호 82번, 대한민국은 '빨리빨리'의 나라이다.
한국인은 OECD 국가 중 최장 수준의 노동 시간에 시달린다. 여유 없이 살다 보니 번아웃에 취약하다.
한국인은 언제쯤 여유롭게 살 수 있을까? 그 전에, 여유란 무엇일까?

여유의 사전적 의미는 '물질적, 공간적, 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물질적 여유)나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 또는 대범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 마음의 상태'(심리적 여유)이다.
대체로 물질적 여유를 누리는 사람이 심리적 여유도 누릴 것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여유餘裕는 남을 여餘에 넉넉할 유裕를 쓴다.
餘는 본래 '밥(食)이 남다'라는 뜻을 지녔던 형성 문자로서 지금은 일반적인 '남다'의 뜻으로 쓰인다.
裕는 본래 옷(衣)이 널찍한 골짜기(谷)처럼 '헐렁하다'라는 뜻을 지녔던 회의 문자로 지금은 성격이나 인품, 재산이 '너그럽다'라는 뜻이다.
밥이 남고 헐렁한 옷을 입으니, 한자어부터 풍채가 좋은 부자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영어로 '여유로운 태도'(relaxed manner)나 '집중을 늦추다'(relax concentration)라고 할 때 relax를 쓴다.
relax는 14세기경 주로 약이나 근육과 관련되어 '덜 촘촘하고 빽빽하게 하다'라는 뜻이었고, 15세기경 '긴장을 풀다'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전에서는 유의어로 융통성, 여분, 여백 등을 제시한다.
융통성은 '그때 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 일을 처리하는 재주'이다. 여유가 있으면 융통성이 생긴다.
경영인의 관점에서, 물질적 자원이 남으면, 꼭 기준에 정확히 맞추지 않더라도 그때그때 적절히 조절해가며 자원을 배분할 수 있다.
또는 마음이 여유로우면(상황을 긴박하다고 판단하지 않으면) 꼭 규칙을 정확히 준수하기보다는 구성원들의 긴장을 풀어줄 수도 있다.

여유의 반대말은 찾기 어려운데, '여유가 있다'라는 말의 반대말을 생각해보면 '쪼들리다' '긴장이 된다', '부족하다' 정도가 있다.
현실적 기준을 충족시킬지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심리적 여유까지 잃는다.
그리고 그 현실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만이 지상 과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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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는 심리적 여유가 없다.
개인에게 요구되는 기준, 들이대어지는 잣대, 즉 스펙이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충족시키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심리적 여유가 없으면, 그 기준들 외에는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지니, 내 주위를 돌아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할 때, 현실적 기준, 잣대, 또는 스펙은 모두 그 목표를 이루는 수단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기준을 충족시키고자 힘내면서도 행복이라는 목적을 늘 마음 한편에 두고 있어야 한다.
즉, 행복을 위해서는 심리적인 여유를 지녀야 한다.

심리적 여유를 지니지 못한 채 눈앞의 현실적 기준들만 충족시키고자 급급하면, 스펙은 높아질지 몰라도 행복감은 떨어질 수 있다.
어차피 완벽한 인간은 없다. 우리는 모두 '함량 미달'이다.
현실적 기준 충족 여부와는 별도로, 행복을 위한 심리적 여유는 누구나 일정 부분 가지고 있어야 한다.


0629

국가번호 82번, 대한민국은 '빨리빨리'의 나라이다.

한국인은 OECD 국가 중 최장 수준의 노동 시간에 시달린다. 여유 없이 살다 보니 번아웃에 취약하다.

한국인은 언제쯤 여유롭게 살 수 있을까? 그 전에, 여유란 무엇일까?

 

여유는 물질적으로 남거나, 심리적으로 너그러운 상태

여유의 사전적 의미는 '물질적, 공간적, 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물질적 여유)나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 또는 대범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 마음의 상태'(심리적 여유)이다.

여유餘裕는 남을 여餘에 넉넉할 유裕를 쓴다.

餘는 본래 '밥(食)이 남다'라는 뜻을 지녔던 형성 문자로서 지금은 일반적인 '남다'의 뜻으로 쓰인다.

裕는 본래 옷(衣)이 널찍한 골짜기(谷)처럼 '헐렁하다'라는 뜻을 지녔던 회의 문자로 지금은 성격이나 인품, 재산이 '너그럽다'라는 뜻이다.

밥이 남고 헐렁한 옷을 입으니, 한자어부터 풍채가 좋은 부자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영어로 '여유로운 태도'(relaxed manner)나 '집중을 늦추다'(relax concentration)라고 할 때 relax를 쓴다.

relax는 14세기경 주로 약이나 근육과 관련되어 '덜 촘촘하고 빽빽하게 하다'라는 뜻이었고, 15세기경 '긴장을 풀다'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유로우면 융통성이 생기는 법

사전에서는 유의어로 융통성, 여분, 여백 등을 제시한다.

융통성은 '그때 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 일을 처리하는 재주'이다. 여유가 있으면 융통성이 생긴다.

경영자 경영인의 관점에서, 물질적 자원이 남으면, 꼭 기준에 정확히 맞추지 않더라도 그때그때 적절히 조절해가며 자원을 배분할 수 있다.

또는 마음이 여유로우면(상황을 긴박하다고 판단하지 않으면) 꼭 규칙을 정확히 준수하기보다는 구성원들의 긴장을 풀어줄 수도 있다.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융통성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일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지나치게 고지식한 사람은 우선 심리적 여유부터 갖추는 편이 좋다.

 

여유는 기준 충족의 문제

'여유가 있다'라는 말의 반대말을 생각해보면 '쪼들리다' '긴장이 된다', '부족하다' 등이 있다.

현실적 기준을 충족시킬지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심리적 여유까지 잃는다. 그리고 그 현실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만이 지상 과제가 된다.


여유 없는 한국인

여유는 기준 충족의 문제이다. 이것이 한국인에게 심리적 여유가 없는 이유이다.

한국인은 개인에게 요구되는 기준, 들이대어지는 잣대, 즉 스펙이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충족시키느라 바쁘다.

심리적 여유가 없으면, 그 기준들 외에는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지니, 내 주위를 돌아볼 수 없게 된다.


행복을 위한 여유 (여유에 꼭 들어갈 꼭지인가?) 

삶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 현실적 기준, 잣대, 또는 스펙은 모두 행복을 이루는 수단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당면한 기준을 충족시키고자 힘내면서도 행복이라는 목적을 늘 마음 한편에 두고 있어야 한다.

즉, 행복을 위해서는 심리적인 여유를 지녀야 한다.

심리적 여유를 지니지 못한 채 눈앞의 현실적 기준들만 충족시키고자 급급하면, 스펙은 높아질지 몰라도 행복감은 떨어질 수 있다.

어차피 완벽한 인간은 없다. 우리는 모두 어떤 기준에서는 '함량 미달'이다.

현실적 기준 충족 여부와는 별도로, 행복을 위한 심리적 여유는 누구나 일정 부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은?

여유는 물질적으로는 남는 것이요, 심리적으로는 너그러운 것이다.

심리적 여유는 물질적 남음에 크게 좌우된다. 여유는 기준 충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여유가 없는 이유는 요구되는 기준이 너무나 많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기준들은 궁극적 목적인 행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마음 한편에 늘 두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행복을 위해서는 스스로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물질과는 별도로 심리적 여유를 지녀야 한다.

여유는 물질적으로는 남는 것이요, 심리적으로는 너그러운 것이다.

심리적 여유는 물질적 남음에 좌우된다. 

남는다는 것은 결국 어떤 기준으로 봤을 때 모자라거나 남는다는 의미이므로 여유에서 중요한 것은 기준을  충족했는가 여부이다.   

한국인에게 여유가 없는 이유도 요구되는 기준이 너무나 많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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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번호 82번, 대한민국은 '빨리빨리'의 나라이다.

한국인은 OECD 국가 중 최장 수준의 노동 시간에 시달린다. 여유 없이 살다 보니 번아웃에 취약하다.

한국인은 언제쯤 여유롭게 살 수 있을까? 그 전에, 여유란 무엇일까?

 

여유는 물질적으로 남거나, 심리적으로 너그러운 상태

여유의 사전적 의미는 '물질적, 공간적, 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물질적 여유)나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 또는 대범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 마음의 상태'(심리적 여유)이다.

여유餘裕는 남을 여餘에 넉넉할 유裕를 쓴다.

餘는 본래 '밥(食)이 남다'라는 뜻을 지녔던 형성 문자로서 지금은 일반적인 '남다'의 뜻으로 쓰인다.

裕는 본래 옷(衣)이 널찍한 골짜기(谷)처럼 '헐렁하다'라는 뜻을 지녔던 회의 문자로 지금은 성격이나 인품, 재산이 '너그럽다'라는 뜻이다.

밥이 남고 헐렁한 옷을 입으니, 한자어부터 풍채가 좋은 부자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영어로 '여유로운 태도'(relaxed manner)나 '집중을 늦추다'(relax concentration)라고 할 때 relax를 쓴다.

relax는 14세기경 주로 약이나 근육과 관련되어 '덜 촘촘하고 빽빽하게 하다'라는 뜻이었고, 15세기경 '긴장을 풀다'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유로우면 융통성이 생기는 법

사전에서는 유의어로 융통성, 여분, 여백 등을 제시한다.

융통성은 '그때 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 일을 처리하는 재주'이다. 여유가 있으면 융통성이 생긴다.

경영자의 관점에서, 물질적 자원이 남으면, 꼭 기준에 정확히 맞추지 않더라도 그때그때 적절히 조절해가며 자원을 배분할 수 있다.

또는 마음이 여유로우면(상황을 긴박하다고 판단하지 않으면) 꼭 규칙을 정확히 준수하기보다는 구성원들의 긴장을 풀어줄 수도 있다.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융통성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일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지나치게 고지식한 사람은 우선 심리적 여유부터 갖추는 편이 좋다.

 

여유는 기준 충족의 문제

'여유가 있다'라는 말의 반대말을 생각해보면 '쪼들리다' '긴장이 된다', '부족하다' 등이 있다.

현실적 기준을 충족시킬지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심리적 여유까지 잃는다. 그리고 그 현실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만이 지상 과제가 된다.


여유 없는 한국인

여유는 기준 충족의 문제이다. 이것이 한국인에게 심리적 여유가 없는 이유이다.

한국인은 개인에게 요구되는 기준, 들이대어지는 잣대, 즉 스펙이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충족시키느라 바쁘다.

심리적 여유가 없으면, 그 기준들 외에는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지니, 내 주위를 돌아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은?

여유는 물질적으로는 남는 것이요, 심리적으로는 너그러운 것이다. 심리적 너그러움은 물질적 남음에 크게 좌우된다.

모자라거나 남는다는 판단은 늘 어떤 기준을 전제하므로, 여유에서 중요한 것은 '기준을  충족했는가'이다.   

한국인에게 여유가 없는 이유는 요구되는 기준이 너무나 많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20220316-건강 (7월업로드)

posted Mar 16, 2022, 11:11 AM by hyoo@crevate.com   [ updated Jun 29, 2022, 11:12 AM by Sung Youn PAK]


[1] 뼈대 세우기

2년이 넘게 계속된 코로나19 팬데믹, 인류는 어느 때보다도 건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아저씨들이나 상투적으로 하는 말처럼 느껴졌던 '건강이 최고야'라는 말이 이제는 어디에서나 들려온다.
행복의 첫째 전제가 건강이라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면 건강이란 무엇일까? 얼마나 건강해야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건강의 사전적 의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무 탈이 없고 튼튼함.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https://ko.dict.naver.com/#/entry/koko/19c8bf0217db4667ba80688ae2a176aa)

한자로는 굳셀 건健에 편안할 강康을 써서 병(病)이 없이 좋은 기능(機能)을 가진 상태(狀態)에 있는 것이라 한다.
健은 사람 인人에 세울 건建을 합친 자로서, 建은 길을 설계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길이 튼튼하게 설계되어야 하듯이, 사람의 몸이 튼튼함을 표현한다.
康은 탈곡기를 그린 천간 경庚 밑으로 쌀(米)이 떨어지는 모습이니, 먹고 사는 문제가 고민이던 시절 추수한 곡식의 낱알을 털어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고 곳간을 채워 편안하다는 뜻이다.

즉 健은 사람의 몸이 길처럼 튼튼하다는 뜻이니 육체적 건강을, 康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 안심한다는 뜻이니 정신적 건강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건강이라는 말 자체에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정신적으로 편안한(康) 이유는 결국 탈곡한 곡식으로 밥을 지어먹으며 이번 겨울을 무탈하게, 죽지 않고 날 수 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정신적 건강이 상당 부분 육체적 건강에 좌우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실제로 건강이라 하면 정신적 건강보다는 육체적 건강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영어로는 health인데, '손상되지 않은' 이라는 뜻의 옛 영어 hælþ에서 왔다고 한다. 중세에는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번영, 행복, 복지, 안전 등을 의미했다고 하며, 1590년대부터는 모두의 건강과 번영을 기원하는 건배사로서 쓰였다고 한다. (https://www.etymonline.com/word/health#etymonline_v_6246)

사전에서는 유의어로 컨디션, 충실, 무병, 건전, 건승, 강녕 등을 제시한다.
컨디션은 기분이나 건강 상태 또는 형편이나 조건, 무병은 병이 없이 건강함, 건전은 병이나 탈이 없이 건강하고 온전함, 건승은 탈 없이 건강함, 강녕은 곧 건강을 말한다.
대체로 '병이나 탈이 없는 것'이 건강이라는 말인데, 병은 '생물체의 전신이나 일부분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현상'이며 탈은 병을 의미하기도 하나
'뜻밖에 일어난 걱정할 만한 사고'를 뜻하기도 하니, 건강은 역시 육체적으로 고장나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안심한 상태를 뜻한다.

한편 건강의 반의어는 앞서 살펴보았던 탈 외에도 쇠약과 허약이 있다.
쇠약은 이전보다 기운이 쇠퇴하고 약해졌음을, 허약은 기운이 없음을 말한다. 두 단어 모두 약할 약弱을 쓰는데 활시위에 떨림이 있음을 표현하여 활시위가 약함을 뜻한 것이다.

정리하면, 건강에는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이 있고, 각각 병(육체적 고장)과 탈(정신적 불안)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1. '무엇이 없는 상태'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건강 자체는 소극적 개념이다. 지금 병과 탈이 없는 상태라면 나는 건강한 것이다. 구태여 '더 건강'해지겠다고 비타민을 찾아 먹을 이유는 사실 없는 것이다.
그러면 건강식품, 건강 보조 식품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상 보험과 비슷한 것이다. 즉 미래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질병에 선제적으로 맞서기 위해, 그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또는 그렇다고 안심하기 위해, 남들이 다 먹으니까) 우리는 비타민을 먹는다. 

2. 한편으로 현대인은 만성적인 우울과 피로에 시달린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대부분의 시민은 건강하지 않다.

3. 이번 대선에서도 '게임이 질병인가?'라는 화두가 던져졌던 적이 있다. 사실 질병은 WHO가 질병분류체계에 집어넣은 뒤에야 세계적으로 질병으로 인정받는다. 그 기준 가운데 하나는 '일상 영위에 장애가 없는가'이다. 게임이라는 콘텐츠는 물론 영화나 만화처럼 질병이 될 수 없는데, 게임 중독을 다른 약물 중독처럼 치료 대상으로 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이런 논의에서 볼 때 질병이 무엇인가, 즉 건강이 무엇인가라는 정의부터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누가 내가 건강하다고 장담해줄 수 있는가? 여러 전문가들이 내 건강에 대해 다른 말을 한다면, 난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4. 건강과 가족은 잃은 뒤에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고 한다. 사실 감기에만 걸려도 최우선 목표는 감기에서 낫는 것이다. 그렇게 나으면 또 건강 문제는 뒷전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나쁜 걸까? 평소에도 건강을 챙기라는 말 자체가 나를 불안에 떨게 한다면 역효과가 아닌가? 이를 확장시켜서, 매일 아침 나의 건강을 체크해 주는 AI가 있다면 나는 정말로 총체적 의미에서 건강해질 수 있을까? 그 AI가 매일 나를 불안하게 하고, 내 식습관과 운동량에 매일 어깃장을 놓는다면 역효과가 아닌가? 결국 AI가 인간에게 제안하는 건강의 범위는, 오히려 의사들이 말하는 그것보다 유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5.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바이러스가 많다고 한다. 코로나19는 풍토병화되었고, 또 다른 바이러스가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방역防疫은 전염병을 막는 일이며 모두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다. 
남의 암보다 내 감기를 치료하는 일이 더 급하다. 남의 병이 아무리 위중하든,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 회복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하지만 건강은 개인만의 것이 아닌 공동체의 것이다. 정신적인 의미든 육체적인 의미든 각자가 건강할 때 모두 건강할 수 있고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고립되어 살아가다 보니 '다함께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은 적다. 공익광고나 정기적 무료 건강검진 등 공적인 주체 말고, 사적인 주체들이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특정 건강식품의 유행만을 촉발하는 웰빙 담론을 넘어, 소확행과 비슷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건강 추구'도 가능하지 않을까?




[2] 글쓰기


2년이 넘게 계속된 코로나19 팬데믹.
인류는 생존과 건강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행복의 첫째 전제가 건강이라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적다.
그러면 건강이란 무엇일까? 예나 지금이나 건강 개념은 변함없을까?

건강의 사전적 의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무 탈이 없고 튼튼함.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한자로는 굳셀 건健에 편안할 강康을 써서 병(病)이 없이 좋은 기능(機能)을 가진 상태(狀態)에 있는 것이라 한다.
健은 사람 인人에 세울 건建을 합친 자로서, 建은 길을 설계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길이 튼튼하게 설계되어야 하듯 사람의 몸이 튼튼함을 표현한다.
康은 탈곡기를 그린 천간 경庚 밑으로 쌀(米)이 떨어지는 모습이니, 먹고 사는 문제가 고민이던 시절 추수한 곡식의 낱알을 털어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으며 곳간을 채우니 편안하다는 뜻이다.

즉 健은 사람의 몸이 길처럼 튼튼하다는 뜻이니 육체적 건강을, 康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 안심한다는 뜻이니 정신적 건강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건강이라는 말 자체에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모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정신적으로 편안한(康) 이유는 결국 탈곡한 곡식으로 밥을 지어 먹으며 이번 겨울을 무탈하게, 죽지 않고 날 수 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정신적 건강이 상당 부분 육체적 건강에 좌우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실제로 건강이라 하면 정신적 건강보다는 육체적 건강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영어로는 health인데, '손상되지 않은' 이라는 뜻의 옛 영어 hælþ에서 왔다고 한다. 중세에는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번영, 행복, 복지, 안전 등을 의미했다고 하며, 1590년대부터는 모두의 건강과 번영을 기원하는 건배사로 쓰였다고 한다. 술을 마시면서 ‘건강을 위하여’를 외치는 문화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은가 보다.

사전에 따르면 건강의 유의어로는 컨디션, 충실, 무병, 건전, 건승, 강녕 등이 있다.
각각의 의미를 살펴보면 대체로 '병이나 탈이 없는 것=건강'임을 알 수 있다.

병은 '생물체의 전신이나 일부분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현상'이며,
탈은 병을 의미하기도 하나 '뜻밖에 일어난 걱정할 만한 사고'를 뜻하기도 하니, 건강은 역시 육체적으로 고장 나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안심한 상태를 뜻한다.

정리하면, 건강에는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이 있고, 각각 병(육체적 고장)과 탈(정신적 불안)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병과 탈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된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 건강 자체는 원래 소극적 개념이다.
지금 병과 탈이 없는 상태라면 나는 건강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의 건강, 즉 웰니스(Wellness)나 활력(Vitality)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기나긴 팬데믹은 사람들을 집 안에 가둬 놓았고, 모기나 독감 바이러스도 희생양을 찾기 어려워하는 지경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집 안에서 무병 무탈한 health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삶의 의미, 재미, 활력소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건강(health)은 마이너스 요인(병, 탈)이 없는 제로(0) 이상의 상태를 지칭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갈수록 플러스 요인(의미, 재미, 활력소)까지도 건강의 필요조건으로 집어넣기 시작하면서,
건강은 '제로(0)가 아닌 플러스', 정적인 '상태'가 아닌 동적인 '생활방식'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젊은 세대가 건강을 위해 '챌린저스' 앱을 사용하거나 바디 프로필을 자랑하는 것도 건강 개념 확대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이제 건강은 병과 탈이 없는 상태나 무병장수라는 슬로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건강은 활력, 재미, 의미를 지속적으로 얻는 생활 양식, 또는 그 양식을 구성하는 지침들의 달성 여부라고 정리할 수 있다.


=아래는 버리는 글들=

한편 건강의 반의어는 앞서 살펴보았던 탈 외에도 쇠약과 허약이 있다.
쇠약은 이전보다 기운이 쇠퇴하고 약해졌음을, 허약은 기운이 없음을 말한다.
두 단어 모두 약할 약弱을 쓰는데 활시위에 떨림이 있음을 표현하여 활시위가 약함을 뜻한 것이다.

그러면 '더 건강'해지겠다고 건강 보조 식품을 찾아 먹는 사람들의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보험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즉 미래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질병에 선제적으로 맞서기 위해, 그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또는 그렇다고 안심하기 위해, 남들이 다 먹으니까) 우리는 비타민을 먹는다. 

건강의 정의는 질병의 정의와도 맞닿아 있다.
지난번 대선에서 '게임이 질병인가?'라는 화두가 던져졌던 적이 있다. 사실 질병은 WHO가 질병 분류체계에 집어넣은 뒤에야 세계적으로 질병으로 인정받는다. 그 기준 가운데 하나는 '일상 영위에 장애가 없는가'이다. 게임이라는 콘텐츠 자체는 물론 영화나 만화처럼 질병이 될 수 없는데, 게임 중독을 다른 약물 중독처럼 치료 대상으로 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이런 논의를 볼 때 질병이 무엇인가, 즉 건강이 무엇인가라는 정의부터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매일 아침 나의 건강을 체크해 주는 AI가 있다면 나는 정말로 건강해질 수 있을까?
그 AI가 내 식습관과 운동량에 매일 어깃장을 놓고 내가 불안에 떨게 된다면, 나아가서 거식증에라도 걸리면 역효과가 아닌가? 결국 AI가 인간에게 제안하는 건강의 범위는, 오히려 의사들이 말하는 그것보다 유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바이러스가 많다고 한다.
코로나19는 풍토병화되었고, 또 다른 바이러스가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방역防疫은 전염병을 막는 일이며 모두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다. 
남의 병이 아무리 위중하든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 회복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하지만 내 몸이 나만의 것이 아니듯, 건강은 개인만의 것이 아닌 공동체의 것이다.
정신적인 의미든 육체적인 의미든 개개인이 건강할 때 모두 건강할 수 있고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고립되어 살아가다 보니 '다 함께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은 적다.
공익광고나 정기적 무료 건강검진 등 공적인 주체의 행위 말고, 사적인 주체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특정 건강식품의 유행만을 촉발하는 웰빙 담론을 넘어, 소확행과 비슷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건강 추구'도 가능하지 않을까?


최종 버전(피드백필요)

2년이 넘게 계속된 코로나19 팬데믹.

인류는 생존과 건강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데 건강이란 무엇일까? 예나 지금이나 건강 개념은 변함없을까?

 

건강은 정신과 육체 양 측면

건강의 사전적 의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무 탈이 없고 튼튼함.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한자로는 굳셀 건健에 편안할 강康을 써서 병(病)이 없이 좋은 기능(機能)을 가진 상태(狀態)에 있는 것이라 한다.

健은 사람 인人에 세울 건建을 합친 자로서, 建은 길을 설계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길이 튼튼하게 설계되어야 하듯 사람의 몸이 튼튼함을 표현한다.

康은 탈곡기를 그린 천간 경庚 밑으로 쌀(米)이 떨어지는 모습이니, 먹고 사는 문제가 고민이던 시절 추수한 곡식의 낱알을 털어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으며 곳간을 채우니 편안하다는 뜻이다.

즉 健은 사람의 몸이 길처럼 튼튼하다는 뜻이니 육체적 건강을, 康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 안심한다는 뜻이니 정신적 건강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건강이라는 말 자체에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모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정신적으로 편안한(康) 이유는 결국 탈곡한 곡식으로 밥을 지어 먹으며 이번 겨울을 무탈하게, 죽지 않고 날 수 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정신적 건강이 상당 부분 육체적 건강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실제로 건강이라 하면 정신적 건강보다는 육체적 건강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한편, 영어로는 health인데, '손상되지 않은' 이라는 뜻의 옛 영어 hælþ에서 왔다고 한다.

중세에는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번영, 행복, 복지, 안전 등을 의미했다고 하며, 1590년대부터는 모두의 건강과 번영을 기원하는 건배사로 쓰였다고 한다.

술을 마시면서 ‘건강을 위하여’를 외치는 문화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은가 보다.


건강은 병이나 탈이 없는 것

사전에 따르면 건강의 유의어로는 컨디션, 충실, 무병, 건전, 건승, 강녕 등이 있다.

각각의 의미를 살펴보면 대체로 '병이나 탈이 없는 것=건강'임을 알 수 있다.

병은 '생물체의 전신이나 일부분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현상'이며,

탈은 병을 의미하기도 하나 '뜻밖에 일어난 걱정할 만한 사고'를 뜻하기도 하니, 건강은 역시 육체적으로 고장 나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안심한 상태를 뜻한다.

정리하면, 건강에는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이 있고, 각각 병(육체적 고장)과 탈(정신적 불안)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건강 자체는 원래 소극적 개념

'병과 탈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된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 건강 자체는 원래 소극적 개념이다.

지금 병과 탈이 없는 상태라면 나는 건강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의 건강, 즉 웰니스(Wellness)나 활력(Vitality)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건강 개념의 확장: 적극적 건강

기나긴 팬데믹은 사람들을 집 안에 가둬 놓았고, 모기나 독감 바이러스도 희생양을 찾기 어려워하는 지경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집 안에서 무병 무탈한 health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삶의 의미, 재미, 활력소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건강(health)은 마이너스 요인(병, 탈)이 없는 제로(0) 이상의 상태를 지칭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갈수록 플러스 요인(의미, 재미, 활력소)까지도 건강의 필요조건으로 집어넣기 시작하면서,

건강은 '제로(0)가 아닌 플러스', 정적인 '상태'가 아닌 동적인 '생활방식'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젊은 세대가 건강한 습관을 만들려고 돈을 거는 시스템인 '챌린저스' 앱을 사용하거나,

SNS에 바디 프로필을 자랑하는 것도 건강 개념 확대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은? 

건강은 어휘 자체에 정신적/육체적 건강 양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육체적으로는 병, 정신적으로는 탈 없는 상태가 건강이다. 즉 건강은 원래 소극적 개념이다.

하지만 오늘날 건강은 병과 탈이 없는 상태나 무병장수라는 슬로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건강은 '활력, 재미, 의미를 지속적으로 얻는 생활 양식, 또는 그 양식을 구성하는 지침들의 달성 여부'라고 정리할 수 있다.

20220315-자유 (7월업로드)

posted Mar 15, 2022, 4:34 PM by hyoo@crevate.com   [ updated Jun 30, 2022, 11:55 AM by Sung Youn PAK]


[1] 뼈대 세우기


자유롭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창의적인 생각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나온다고들 한다.
어떤 식당은 우유부단한 한국인들을 위해 '주방장 맘대로'라는 메뉴까지 적어두기도 한다.
하지만 이 메뉴를 선뜻 주문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끊임없는 선택과 책임의 연속인 오늘날, 자유는 마냥 좋기만 한가?

자유의 사전적 정의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있는 상태'라 한다. (https://ko.dict.naver.com/#/entry/koko/c35cb8c05b36448781c64c89309ecd11)

한자로는 스스로 자自에 말미암을 유由를 쓰는데, 둘 다 상형문자이다. 自는 본래 얼굴의 중심인 코를 본뜬 자로서 '자기, 스스로'라는 뜻으로 확장되었다 하며, 由는 본래 등잔을 본뜬 자로서 지금은 '말미암다, 꾀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한다. (https://hanja.dict.naver.com/#/entry/ccko/b91451f5ab0f409db537e525cd6172e1)

자유는 명사이지만 그 자체로 주어+동사의 의미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다른 누구도 아닌 행동의 주체로서) '자신'이 마음대로 무언가 '한다'라는 것이다.

자유를 뜻하는 영단어에 freedom과 liberty가 있지만 좀 더 일상적인 freedom을 보자. freedom은 물론 형용사 free를 명사화한 것으로 14세기경부터 '독단적, 전제적 통제로부터의 면제, 시민의 자유'라는 뜻으로 쓰였다 하며, 형용사 free는 13세기경부터 '장애물이 없는'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한다. 

자유와 비슷한 말로는 자재自在가 있다. 있을 재在를 쓰니 '저절로 있음'이라는 뜻이다. 동적인 由보다는 한결 정적인 느낌이다. 언뜻 산, 바다와 같은 자연自然의 우직함도 느껴진다.
자유와 합쳐서 자유자재라고도 쓴다. 거침없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니, 자유를 더욱 강조한 말이다.
'존재'가 '행동'하는 것인데 어찌 자재자유가 아니라 자유자재인가? 하기야 '자유'라면 이미 '자재'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니, 자유자재의 자재는 그저 강조를 위한 덧말에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

자유의 반대말로는 결박, 구속, 규제 등이 있다. 결박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는 것, 구속은 행동이나 의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규제는 규칙 등으로 일정한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막고 묶는 것의 반대가 자유라는 말이다. 그 울타리를 허물고 매듭을 푸는 것이 자유라는 말이다.

이상에서 볼 때 자유自由에 대해 두 가지 함의를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애초에 행동의 주체인 自가 존재하지 않고서 자유는 아무 의미가 없다. 즉 자유는 언제나 '누군가의 자유'여야만 한다.
둘째, 자유는 장애물을 허무는 것이니 동적이며 실천적인 개념이다. 자유로운 실천이 없으면 자유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울타리를 허물 힘이 있어도, 실제로 허물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다.

1.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하곤 한다. 소극적 자유가 전통적인 개념이고, 복지국가가 들어서면서 자아 실현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와 자아 실현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가? 자유로운 행위 중 일부의 목적이 자아 실현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또, 자유가 과연 소극적인 개념인가? 자유야말로 자신을 묶은 사슬을 벗어던지는 행위를 가능케 하는데, '소극적 자유' 자체가 지나친 상대론 아닌가?

2. 어디까지가 정말 본질적인 自의 의지이며 어디부터가 학습에 따른 결과물인가? 학습된 결과물조차 自의 의지라고 본다면, 늑대소년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그를 늑대 무리로부터 빼와서는 안 되는 것인가? 아니다. 자유는 극히 인간적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새로 출발해야 할 듯 하다. 답답함을 해소하고 눈앞의 장애물을 허물려는 짐승의 본능은 수만 년간 이어져 왔는데, 전제군주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욕구나 행위조차 이와 같이 자연적이라는 견지에서 '자유' 개념은 시작됐다. 즉 자유는 앞서 말했듯 '누군가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어떤 인간의 자유'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3. 자유의 주체는 어떤 인간이다. 그는 울타리를 허무는 상상을 하며 자유 의지를 갖고, 울타리를 허무는 실천을 하며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이 의지의 발생과 실천에 다른 인간이 개입할 여지는 없는가? 이제 어려운 철학적 문제에서 다소 비껴 서서 이렇게 물어보자. 기업은 소비자를 어떻게 자유롭게 할 수 있는가? 기업이 자기 제품을 사라고 설득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에서 있을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잡음들은 과연 소비자를 자유롭게 하는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말이 단순한 오지랖이나 꼰대질이 아니라 진짜 '자유로운 세계로의 초대'처럼 달콤하게 느껴진 이유는 무엇인가?

4. '자유'로운 경험을 팔기 위해서는 소비자를 둘러싼 여러 '구속'을 발견해야 한다. 그 구속을 제대로 지적하고, 구속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비자가 공감할 때 '자유 마케팅'은 성공한다 -> 소비자가 '자유'를 인지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유가 아닌 상태, 즉 구속 상태라는 것를 스스로 인지가 필요하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문구를 보면 앞에서 구속 상황을 인지시키고 있기 때문에 자유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자유가 더 극도로 커지면 방종? 자유가 없어진다면 뭘까?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빡빡하게 학습 계획을 짜는 사람은 본인 의지로 그렇게 계획표를 짰으면 자유로운 것인가? 본인이 한다는 측면에서는 자유 아닌가? 

5. 자유 마케팅의 강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상품의 종류에 따라 어떤 상품은 강한 자유에, 어떤 상품은 약한 자유에 들어맞을 수도 있다. 강한 자유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전혀 생각지 못한 도전 등이다. 여행, 관광, 레저, 스포츠 등이 강한 자유 마케팅이다. 반면 약한 자유란 일상 속에서 누리는 자유이다. 소확행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일상을 벗어나지 않기에 쾌감은 적지만, 무엇보다도 '안전하다'. 몸을 과격하게 움직이거나 대중교통을 몇 시간동안 기다리지 않고도 누릴 수 있다. 패션, 게임, 영화관 등이 약한 자유 마케팅이다.
예컨대 요즘은 지상파에서도 많이 나오는 모바일 게임 '삼국지' 광고를 떠올려보자. 중년 남성 연예인 세 명이 현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게임 속 병사들을 거느리는 장수로 변신해 전략으로 다툰다. 이 광고에서 중년 남성들은 그들을 구속하는 일상에서 편리하고 안전하게 벗어나 게임 속 세상에서 장수가 된다. 그들은 비록 배우자가 친정에 갔을 때 다함께 낚시나 등산을 갈 때만큼 자유롭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일상 속에서 틈틈이, 짬을 내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약한 자유 마케팅은 구속에서의 완전한 이탈보다는 환상 세계로의 전환이나 망각이라는 테마로 구성된다.
강한 자유, 약한 자유가 처음 들어보는 개념이어서 잘 와닿지가 않음. 구속, 억압을 벗어나기 위해서 꼭 현실에서 탈피만 있는 것은 아니고 상상을 통한 환상 세계의 전환이나 망각으로도 가능하고 메타버스도 이러한 자유에서 나온 거? 

6. '구독경제의 피로함'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반찬 배달 서비스를 한 달간 신청했는데, 열흘 지나니 그 집 반찬을 더 먹고 싶지 않다. 하지만 돈이 아까우니 중도 포기하기는 싫다. 이런 현상이 보편적이라면, 구독경제(또는, '매일 아침 문앞에 배달된 반찬을 받아보는 경험'이라는 점에서 경험경제) 체제에서 소비자들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거역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일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욕구를 지니고 있을지 오늘의 내가 어떻게 아는가? 기업은 소비자를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옭아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기업이 소비자를 자유롭게 하려면 다양한 옵션을 제공해야 하고, 되도록 세밀하게 커스터마이징된 상품을 제공해야 한다. 구독경제, 경험경제 체제에서 소비자는 잘 포장된 상품 하나하나가 아니라 어떤 네러티브 가운데서 맥락의 파편을 구매한다. 그런데 그 맥락이 시간에 따라 달라질 우려가 있다면, 기업은 그 점을 사전 고지하고 소비자가 경험할 지 모르는 불편을 해소하려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소비자A가 오늘 자유를 위해 구매한 그 상품이 내일은 그를 구속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너무 기업을 강제로 연결시킬 필요는 없음. 자유 의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인가? 자유와 계획은 상충하는 개념인가? 자유는 늘 즉흥성을 전제로 하는 것인가?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따라오려면 질문을 던져주고 그 질문을 따라가게 하는 것도 방법일 것 같습니다.  

[2] 글쓰기

사이트에는 밑 줄을 그으면 좋겠습니다. 수정을하게 된다면 [2]밑에 [3]으로 하시면 됩니다. 중간에 줄 넣는 것은 삽입> 가로줄 하면 됩니다. 


자유롭게 선택하길 바라는 사람은 많지만, 책임을 지고자 하는 사람은 적다.

끊임없는 선택과 책임의 연속인 오늘날, 자유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자유의 사전적 정의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이다.

 

한자로는 스스로 자에 말미암을 유를 쓴다. 둘 다 상형문자이다.

는 본래 얼굴의 중심인 코를 본뜬 자로서 '자기, 스스로'라는 뜻으로 확장되었다 하며, 는 본래 등잔을 본뜬 자로서 지금은 '말미암다, 꾀하다' 등 다양한 의미라고 한다.

즉, 자유는 명사이지만 그 자체로 주어+동사의 의미를 포함한다. '자신'이 마음대로 무언가 '한다'라는 것이다. 즉, 마음만 먹어서는 안 되며 무언가 행동으로 옮겨야 자유라 할 수 있다.

 

자유를 뜻하는 영단어인 freedom은 형용사 free 뒤에 dom을 붙여 명사화한 것으로 14세기경부터 '독단적, 전제적 통제로부터의 면제, 시민의 자유'라는 뜻으로 쓰였다 하며, 형용사 free13세기경부터 '장애물이 없는'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한다. 그러다 1580년대 들어 '무료로 제공됨'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자유의 반대말로는 결박, 구속, 규제 등이 있다.

결박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는 것, 구속은 행동이나 의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규제는 규칙 등으로 일정한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가로막고, 묶는 것의 반대가 자유라는 말이다.

즉 그 울타리를 허물고 매듭을 푸는 것이 자유라는 말이다.

 

이상에서 자유自由에 대해 두 가지 함의를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애초에 행동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고서 자유는 아무 의미가 없다.

즉 자유는 언제나 '누군가의 자유'여야만 한다.

그 누군가는 울타리를 허무는 상상을 하며 자유의지를 갖고, 실제로 허물며 자유로워진다.

 

둘째, 자유는 장애물을 허무는 것이니 동적이며 실천적인 개념이다.

자유를 향한 의지나 실천이 없다면 자유는 의미가 없다.

잘 세뇌된 서커스 코끼리를 생각해보라. 울타리를 허물 힘이 있어도 실제로 허물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다.

 

한편 자유와 관련된 개념으로 방종은 무엇이고, 자율은 무엇인가?

방종은 '아무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함'이며, 자율은 '스스로 자기의 방종을 억제함'이다. 


방종은 언뜻 보면 자유와 비슷하지만, '함부로' 행동한다는 제약이 붙어있다. 자유로운 행위 중에서도 함부로, 즉 충분한 고민 없이 한 행위만이 방종이다.

그러면 무엇을 충분히 고민하고 행동해야 자유로우면서도 방종이 아닐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자율'이라는 말이 드러내듯 '율(律)' 즉 사회적 규칙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규칙은 개인에게는 때때로 울타리가 되기도 한다. 허나 그 울타리를 허물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순간, 그 행위는 방종이 된다.

정리하면, 자유 자체는 누군가 울타리를 허무는 일로서 중립적인 개념이나, 그 울타리가 규칙인 경우 '방종'이라는 부정적인 개념으로 따로 분류한다.


어떤 행위는 자유롭고, 어떤 행위는 자유롭지 않은가? 

사회적 규칙을 지키면서 내 뜻대로 하는 모든 행위는 자유로운가? 이는 '나'나 '울타리'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어려운 문제이다.


주관적, 감정적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어떤 경우에 '자유로운 기분'이 드는지는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일상의 굴레나 구속을 벗어났을 때 드는 '해방감'도 여기에 속한다. 간만에 휴가를 얻어 여행을 떠났을 때, 지옥 같았던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이런 해방감을 누릴 수 있는 기회는 몇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이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기분'은 꽤 자주 느낄 수 있다.

오늘 저녁은 혼밥인데, 떡볶이를 먹을까, 피자를 먹을까? 두 메뉴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을 할 때를 생각해보자.

심각하지 않은 상황에서, 심각하지 않은 주제로 고민할 때,

실패하더라도 손해가 크지 않고, 온전히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거리낌 없이 선택하고, 선택의 뒷맛도 찜찜하지 않다.

자유로운 기분을 맛보려면 선택의 상황 자체가 여유롭게 세팅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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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홈페이지에 올리기엔 적절하지 않은 부분 (22.04.07.)

'자유'로운 경험을 팔기 위해서는 소비자를 둘러싼 여러 '구속'을 발견해야 한다.

구속의 강도가 다르다면, 자유의 강도도 다르지 않을까? 상품의 종류에 따라 어떤 상품은 강한 자유에, 어떤 상품은 약한 자유에 호소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강한 자유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전혀 생각지 못한 도전 등이다.

여행, 관광, 레저, 스포츠 등이 강한 자유 마케팅에 적합하다.

 

반면 약한 자유란 일상 속에서 누리는 자유이다. 소확행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일상을 벗어나지 않기에 쾌감은 적지만, 무엇보다도 '안전하다'.

몸을 격렬히 움직이거나 대중교통을 몇 시간 동안 기다리지 않고도 누릴 수 있다.

패션, 게임, 영화관 등이 약한 자유 마케팅에 적합하다.

 

예컨대 요즘은 지상파에서도 많이 나오는 모바일 게임 '삼국지' 광고를 떠올려보자.

중년 남성 연예인 세 명이 현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게임 속 병사들을 거느리는 장수로 변신해 전략으로 다툰다. 이 광고에서 중년 남성들은 그들을 구속하는 일상에서 편리하고 안전하게 벗어나 게임 속 세상에서 장수가 된다. 그들은 비록 배우자가 친정에 갔을 때, 다 함께 낚시나 등산을 갈 때만큼 자유롭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일상 속에서 틈틈이, 짬을 내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약한 자유 마케팅은 구속에서의 완전한 이탈보다는 일상의 망각이나 대안적 세계로의 전환이라는 주제로 구성된다.

 

'구독경제의 피로함'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반찬 배달 서비스를 한 달간 신청했는데, 열흘 지나니 그 집 반찬을 더 먹고 싶지 않다.

하지만 돈이 아까우니 중도 포기하기는 싫다.

 

이런 현상이 보편적이라면, 구독경제(또는, '매일 아침 문 앞에 배달된 반찬을 받아보는 경험'이 상품이라는 점에서 경험경제) 체제에서 소비자들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거역하면서 사는 것이 아닌가? 내일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욕구를 지니고 있을지 오늘의 내가 어떻게 안다고. 기업은 소비자를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옭아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업이 소비자를 자유롭게 하려면 다양한 옵션을 제공해야 하고, 되도록 세밀하게 커스터마이징된 상품을 제공해야 한다. 구독경제, 경험경제 체제에서 소비자는 잘 포장된 상품 하나하나가 아니라 어떤 네러티브 가운데서 맥락의 파편을 구매한다. 그런데 그 맥락이 시간에 따라 달라질 우려가 있다면, 기업은 그 점을 사전 고지하고 소비자가 경험할지 모르는 불편을 해소하려 힘써야 한다. 소비자A가 오늘 자유를 위해 구매한 그 상품이 내일은 그를 구속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A는 그 구속에서 해방되고자 당신의 경쟁사에서 또다른 자유를 구매할지도 모른다.


0629


자유롭게 선택하길 바라는 사람은 많지만, 책임을 지고자 하는 사람은 적다.

끊임없는 선택과 책임의 연속인 오늘날, 자유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언제 자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는가?


자유에서 중요한 것은 실천

자유의 사전적 정의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이다.

한자로는 스스로 자自에 말미암을 유由를 쓴다. 둘 다 상형문자이다.

自는 본래 얼굴의 중심인 코를 본뜬 자로서 '자기, 스스로'라는 뜻으로 확장되었다 하며, 由는 본래 등잔을 본뜬 자로서 지금은 '말미암다, 꾀하다' 등 다양한 의미라고 한다.

따라서 자유는 명사이지만 그 자체로 주어+동사의 의미를 포함한다. '자신'이 마음대로 무언가 '한다'라는 것이다.

즉, 마음만 먹어서는 안 되며 무언가 행동으로 옮겨야 자유라 할 수 있다.

한편, 자유를 뜻하는 영단어인 freedom은 형용사 free 뒤에 –dom을 붙여 명사화한 것으로 14세기경부터 '독단적, 전제적 통제로부터의 면제, 시민의 자유'라는 뜻으로 쓰였다.

형용사 free는 13세기경부터 '장애물이 없는'이라는 뜻으로 쓰이다가, 1580년대 들어 '무료로 제공됨'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기 시작했다.

워싱턴 한국전기념조형물에 새겨져 있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말은 유명하다.


자유는 울타리를 허물고 매듭을 푸는 것

자유의 반대말로는 결박, 구속, 규제 등이 있다.

결박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는 것', 구속은 '행동이나 의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규제는 '규칙 등으로 일정한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가로막고, 묶는 것’의 반대가 자유의 의미이다.

즉 그 울타리를 허물고 매듭을 푸는 것이 자유라는 말이다.

(울타리를 허물고 매듭을 푸는 게 자유라는 건가? 무슨 의미인지 확 와닿지는 않는데 더 풀어쓰거나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해 줘야 하지 않을지...) 


자유는 행동하는 주체가 실천하는 것
이상에서 자유自由에 대해 두 가지 함의를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애초에 행동의 주체(自)가 존재하지 않고서 자유는 아무 의미가 없다. 
즉 자유는 언제나 '누군가의 자유'여야만 한다.
그 누군가는 울타리를 허무는 상상을 하며 자유의지를 갖고, 실제로 허물며 자유로워진다.
둘째, 자유는 장애물을 허무는 것이니 동적이며 실천적인 개념이다.
자유를 향한 의지나 실천이 없다면 자유는 의미가 없다. 앞에 자유는 실천이 중요가 나왔기 때문에 두 번째는 끄덕여 지는데 누군가의 자유는 어디에서 나온 건지? 처음 나온 건지? 자유 뿐만 아니라 항상 주체의 문제는 있는 거 아닌지? 
잘 세뇌된 서커스 코끼리를 생각해보라. 울타리를 허물 힘이 있어도 실제로 허물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다.  두 가지 함의를 왜 뽑았는지 앞과 뒤를 연결하는 건가?  위 단락들에서 각각 함의를 뽑는 건 어떨지? 

자유와 관련된 개념, 방종과 자율
자유와 관련된 개념으로 방종은 무엇이고, 자율은 무엇인가? 자유와는 다른 결이지만 비슷한 의미로 방종이나 자율도 있다. 방종은 무엇이고, 자율은 또 무엇인가? 
방종은 '아무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함'이며, 자율은 '스스로 자기의 방종을 억제함'이다.
방종은 언뜻 보면 자유와 비슷하지만, '함부로' 행동한다는 제약이 붙어있다. 자유로운 행위 중에서도 함부로, 즉 충분한 고민 없이 한 행위만이 방종이다.
그러면 무엇을 충분히 고민하고 행동해야 자유로우면서도 방종이 아닐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자율'이라는 말이 드러내듯 '율(律)' 즉 사회적 규칙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규칙은 개인에게는 때때로 울타리가 되기도 한다. 허나 그 울타리를 허물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순간, 그 행위는 방종이 된다.
즉, '자유' 자체는 '누군가 울타리를 허무는 일'로서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개념이다.
하지만 울타리가 사회적 규칙인 경우 '방종'이라는 부정적인 개념으로 따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자유를 느낄까?  (2부 같은 느낌이어서 환기를 시키는 문장이 들어가는 게 어떨지?)

자유로워진 기분, 해방감
주관적, 감정적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어떤 경우에 '자유로운 기분'이 들까?
일상의 굴레나 구속을 벗어났을 때 드는 '해방감'도 이러한 기분의 일종이다.
간만에 휴가를 얻어 여행을 떠났을 때, 지옥 같았던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하지만 이런 큰 해방감을 누릴 수 있는 기회는 몇 년에 한 번 정도이다.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기분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기분'은 더 자주 느낄 수 있다.
오늘 저녁은 혼밥인데, 떡볶이를 먹을까, 피자를 먹을까? 두 메뉴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을 할 때를 생각해보자.
이처럼 심각하지 않은 상황에서, 심각하지 않은 주제로 고민할 때,
실패하더라도 손해가 크지 않고, 온전히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거리낌 없이 선택하고, 선택의 뒷맛도 찝찝하지 않다.
자유로운 기분을 맛보려면 내가 고를 만한 갈림길, 부술 만한 울타리라고 느낄 때 이다. 느껴야 한다.
즉 선택의 상황 자체가 여유롭게 세팅되어 있어야 한다. 선택 상황이 여유롭게 세팅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의 의지로 선택할 때 사람들은 자유를 느낀다. 
'답정너' 식의 옵션만 주고 자유라고 포장한다면, 당사자는 더 큰 구속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느낄 수 도 있다. (조금 더 확신에 찬 어조였으면...) 

무한한 옵션과 자유
그러면 아예 무한한 옵션을 주면 더 자유롭다고 느낄까?
오늘 저녁 혼밥 메뉴를 정하고 있는데, 세계의 온갖 다채로운 요리의 목록이 적힌 요리책이 필요할까?
지나치게 옵션이 많이 제시되면 오히려 혼란스러울 뿐이다. 울타리를 부술 도구를 얻은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울타리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다.
정리하면, 자유로운 기분을 주려면 옵션을 너무 적게 주어도, 너무 많이 주어도 안 된다.

그래서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은?
자유는 '행동의 주체가 울타리를 허무는 일'이며 실천적인 개념이다. '주체'나 '울타리'의 정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말이 너무 어렵다능...행동의 주체. 울타리를 허무는 일. )
문제해결 상황에서 자유로운 기분은 선택지의 수에 좌우된다. 간섭 없이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기분을 맛보려면 옵션이 너무 적어서도, 많아서도 안 된다.
모두에게 적절한 수준의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은 어렵지만, 자신감, 실천 의지, 능력, 필요 등을 자세히 파악하여 선택지를 구성해야 한다.

자유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로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맞나? 상상의 자유는 어떻게 된 걸까? )  
그 자유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 한해서 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 
자유의 기분은 다른 말로는 해방감이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자유를 느낄 수가 있는데 문제 해결 상황에서 내가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자유를 느낀다.  
선택지가 너무 적지도 많지도 않을 때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생각을 한다.   

자유 어렵네 ㅠㅠ 


0630


자유롭게 선택하길 바라는 사람은 많지만, 책임을 지고자 하는 사람은 적다.

끊임없는 선택과 책임의 연속인 오늘날, 자유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언제 자유로운 기분을 느낄까?


자유에서 중요한 것은 실천

자유의 사전적 정의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이다.

한자로는 스스로 자自에 말미암을 유由를 쓴다. 둘 다 상형문자이다.

自는 본래 얼굴의 중심인 코를 본뜬 자로서 '자기, 스스로'라는 뜻으로 확장되었다 하며, 由는 본래 등잔을 본뜬 자로서 지금은 '말미암다, 꾀하다' 등 다양한 의미라고 한다.

따라서 자유는 명사이지만 그 자체로 주어+동사의 의미를 포함한다. '자신'이 마음대로 무언가 '한다'라는 것이다.

즉, 마음만 먹어서는 안 되며 무언가 행동으로 옮겨야 자유라 할 수 있다.

잘 세뇌된 서커스 코끼리를 생각해보라. 울타리를 허물 힘이 있어도 실제로 허물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

자유의 반대말로는 결박, 구속, 규제 등이 있다.

결박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는 것', 구속은 '행동이나 의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규제는 '규칙 등으로 일정한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가로막고, 묶는 것’의 반대가 자유의 의미이다.

나를 가둔 울타리를 허물고, 나를 묶은 매듭을 푸는 것처럼, 내 행위를 제약하는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유이다.


영어로 쓴 자유, freedom

한편, 자유를 뜻하는 영단어인 freedom은 형용사 free 뒤에 –dom을 붙여 명사화한 것으로 14세기경부터 '독단적, 전제적 통제로부터의 면제, 시민의 자유'라는 뜻으로 쓰였다.

형용사 free는 13세기경부터 '장애물이 없는'이라는 뜻으로 쓰이다가, 1580년대 들어 '무료로 제공됨'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기 시작했다.

워싱턴 한국전기념조형물에 새겨져 있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말은 유명하다.


방종과 자율
자유와는 다른 결이지만 비슷한 개념으로 방종이나 자율도 있다.
방종은 무엇이고, 자율은 또 무엇인가? 
방종은 '아무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함'이며, 자율은 '스스로 자기의 방종을 억제함'이다.
방종은 언뜻 보면 자유와 비슷하지만, '함부로' 행동한다는 제약이 붙어있다.
방종은 자유의 일부이다. 자유로운 행위 중에서도 함부로, 즉 충분한 고민 없이 한 행위만이 방종이다.
그러면 무엇을 충분히 고민하고 행동해야 자유로우면서도 방종이 아닐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자율'이라는 말이 드러내듯 '율(律)' 즉 사회적 규칙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규칙은 개인에게는 때때로 제약이 되기도 한다. 허나 그 규칙을 허물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순간, 그 행위는 방종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자유를 느낄까? 

자유로워진 기분, 해방감
일상의 굴레나 구속을 벗어났을 때 드는 '해방감'은 자유로운 기분의 일종이다.
간만에 휴가를 얻어 여행을 떠났을 때, 지옥 같았던 학교를 졸업했을 때...
하지만 이런 큰 해방감을 누릴 수 있는 기회는 몇 년에 한 번 정도이다.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기분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기분'을 더 자주 느낄 수 있다.
오늘 저녁은 혼밥인데, 떡볶이를 먹을까, 피자를 먹을까? 두 메뉴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을 할 때를 생각해보자.
이처럼 심각하지 않은 상황에서, 심각하지 않은 주제로 고민할 때,
실패하더라도 손해가 크지 않고, 온전히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거리낌 없이 선택하고, 선택의 뒷맛도 찝찝하지 않다.
자유로운 기분을 맛보는 때는 내가 고를 만한 갈림길, 부술 만한 울타리라고 느낄 때이다.
즉 선택 상황이 여유롭게 세팅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의 의지로 선택할 때 사람들은 자유를 느낀다. 
'답정너' 식의 옵션만 주고 자유라고 포장한다면, 당사자는 더 큰 구속감을 느낄 수도 있다.

무한한 옵션과 자유
그러면 아예 무한한 옵션을 주면 더 자유롭다고 느낄까?
오늘 저녁 혼밥 메뉴를 정하고 있는데, 세계의 온갖 다채로운 요리의 목록이 적힌 요리책이 필요할까?
지나치게 옵션이 많이 제시되면 오히려 혼란스러울 뿐이다. 울타리를 부술 도구를 얻은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울타리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다.
정리하면, 자유로운 기분을 주려면 옵션을 너무 적게 주어도, 너무 많이 주어도 안 된다.

그래서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은?
자유는 단순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기보다는 그것을 지향하는 실천, '구속을 벗어나는 실천'이다.
구속을 느끼고 불편하거나 귀찮아서 몸부림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최소한 벗어나려는 의지, 계획,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대체로 자유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 한해서 허용된다. 그렇지 않은 자유는 방종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자유를 느낀다. 바로 문제 해결 상황에서 내가 선택을 할 수 있을 때이다.
선택지가 너무 적지도 많지도 않을 때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크리베이트 #개념어사전 #자유